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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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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부파

   개부파(開府派)는 
15세  高敞縣監公 諱 평(坪)의 子 인 16세 諱 대년(大年)이 派祖이시며
17세 諱 억중(億中), 18세 諱 덕사(德思)까지 경남 함양에 거주 하시다가
19세 諱 인(仁)께서 개성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신 이래로 개성이 세거지가 되었다.


 

    개성의 역사와 남겨진 문화재

            

                                                          홍 영 의(개경학연구소 소장)

   

1. 고려 태조 왕건이 송악에 수도를 정한 까닭 - 경기와 수도의 입지조건

  고려의 수도인 개경의 입지는 전체적으로 구릉지대로서, 

북쪽-천마산(天摩山, 762m), 국사봉(國師峰, 764m), 제석산(帝釋山, 744m) 등과 

동북쪽-화장산(華藏山, 563m), 동남쪽-진봉산(進鳳山, 320m), 서북쪽-만수산(萬壽山, 228m) 등이 도시의 외곽을 에워싸며, 

북쪽의 송악산(松嶽山, 488m)으로부터 남쪽의 용수산(龍岫山, 177m)으로 연결되는 구릉들이 시가지 주위를 둘러싸 경계를 형성하고 그

 능선을 따라 성곽(羅城)을 쌓아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방어하였음.

 

  또한 집권층과 수도민의 경제적 토대인 농지면에 있어서도 앞에는 예성강 유역의 신광(新光), 연백(延白) 평야, 사천강 유역의 사천평야, 임진강 하류의 장단(長端) 평야, 한강하류의 풍덕(豊德), 김포(金浦) 평야 등 드넓은 농경지가 있어서 경제생활에 필요한 모든 물자를 충분히 확보할 수 있는 잇점도 있음. 

여기에 동쪽으로는 임진강(臨津江), 동남쪽으로는 사천강(沙川江)과 황해로 나가는 예성강(禮成江)이 있어서 벽란도(碧瀾度)에는 전국 각처에서 들어오는 각종 세공(稅貢)과 물자들이 쌓일 수 있었고, 중국이나 외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상선(商船)들이 머물 수 있는 좋은 해상수송로를 가지고 있음. 

이러한 입지조건은 수도가 지녀야 할 제일 조건에 해당하는 것.

 

원래 한 나라의 수도가 정해지기 위해서는 몇가지 조건을 필요로 함. 

즉 왕조가 바뀌어 수도를 옮기지 않는 한, 집권자의 정치적 이익과 백성들의 이해여부,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경제적 입지조건과 자연지리적 환경을 중시한 보안(保安)의 기능을 지닌 지역이 우선 되어져야 하고, 다시 그 지배의 정점에 위치한 국왕의 발상(發祥) 근거지가 서려있는 곳이 고려됨. 

개경은 이러한 특징 가운데 하나인 국왕의 발상 근거지와 일치하고 있어서 고대의 삼국의 수도나 조선의 한양과는 다른 면이 보임.

 

  다소 설화적인 표현으로 윤색되어 있으나,『고려사(高麗史)』고려세계(高麗世系)에 인용되어 있는 김관의(金寬毅)의 『편년통록(編年通錄)』내용을 종합해 보면, 

왕건 집안은 원래 부소산(扶蘇山)을 중심으로 거주해 오다가 서강(西江) 영안촌(永安村 : 개풍군 남면 창릉리) 지역의 해상부호와 결함함으로써 예성강 하구를 중심으로한 큰 세력으로 부상한 다음, 왕건의 조부인 작제건(作帝建) 대에 4주 3현에 걸치는 세력을 확보하고 부친인 왕융(王隆) 대에 이르러 경기 북부 예성강지역 일대의 대표적인 지방세력으로 등장하였음.

 

  또한 여기에 적절히 풍수도참을 적용하였다는 점도 고대 삼국의 수도와는 다른 특징.

 원래 개경은 마두명당(馬頭明堂)이니 부소명당(扶蘇明堂) 또는 송악명당(松嶽明堂)이니 하여 이른바 명당의 땅으로 일컬어졌던 곳. 

예컨데, 신라 감간(監干) 팔원(八元)의 “만일 군(郡)을 산남(山南)에 옮기고 솔을 심어 암석이 드러나지 않게 하면 삼한을 통합할 자가 나오리라”는 언급이나,

 “이 지맥이 왕방인 백두산 모목간으로부터 내려와 마두명당에 떨어졌으며 그대는 또 수의 명수를 지녔으니 마땅히 수의 대수를 좇아 집을 짓되 66으로하여 36구를 만들면 천지의 대수에 부응되어 명년에는 반드시 성자를 낳을지니 이름을 마땅히 왕건이라고 지으라”고 하였던 도선(道詵)의 풍수설과 왕융(王隆)이 궁예에게 “대왕께서 만일 조선(朝鮮)․숙신(肅愼)․변한(卞韓)의 땅(한반도와 만주일대를 가르킴)에 왕이 되시려거든 먼저 송악에 성을 쌓고 나의 장자(長子)로써 그 성주(城主)를 삼으소서”라고 하여, 이곳에 발어참성(勃禦塹城)을 쌓게 하고 왕건을 성주로 삼게 하는 등 도읍을 옮기게 하였던 일은 풍수지리의 시대적 분위기를 짐작케하는 것임.

 

  특히 왕융의 의도는 궁예를 자신의 세력내로 불러들여 자신의 지역적 위상을 보장받는 동시에 도읍을 이곳에 자리잡게 하여 경제적 이득 또한 꾀하려 했던 것. 

궁예 또한 최소한 경제적으로 국가재정의 기반을 안정적으로 제공받을 수 있는 곳을 필요로 하였기에 자연스럽게 철원에서 도읍을 옮기게 된 배경이 되었을 것. 

그러나 궁예는 이 지역이 세력판도를 확장할 수 있는 거점으로 용이한 지역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왕건의 세력확대에 대항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불안정한 정권 기반에 따른 불안감의 가중으로 인하여 왕건을 중심으로 하는 송악지역의 해상지역을 벗어나 다시 내지의 농업경제적 기반을 가진 철원으로 천도함.

 

  이러한 분위기는 철원에서 고려를 세운 왕건에게도 그대로 적용됨. 왕건의 쿠테타가 비록 성공은 하였지만, 궁예의 지지세력과 지방세력의 반발과 동요를 가져옴. 쿠테타 직후 발생한 환선길(桓宣吉), 이흔암(伊昕巖)의 역모사건과 적지 않은 철원과 충주지역의 친 궁예 지지세력은 왕건을 위협하는 직접적인 요소가 되었으며, 정치력이 취약한 조건속에서 왕권을 안정화를 도모하기 위해서는 수도를 자신의 정치, 경제적 기반이 확고한 연고지로 옮기지 않을 수 없었던 것. 

이로써 신라의 변방으로 위치하였던 송악은 꾸준히 성장해온 왕씨 해상세력에 의해 한반도의 중심부로 자리잡는 계기가 되었고, 그동안 누려왔던 신라 경주 중심의 정치․경제․문화를 국토의 중앙으로 옮기게 되었던 것.

 

  경기는 왕실과 왕경을 보위(保衛)하는 울타리 - ‘근본이 되는 곳(根本之地)’, ‘사방의 근본(四方之本)’, ‘왕의 교화가 먼저 미쳐야 할 곳(王化所先)’으로 중시. 

본래 경기제도는 한(漢) 이래로 역대 왕조에 걸쳐 계승 발전해 온 것으로, 천자(天子)를 정점으로 하는 정치적 지배질서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함. 

경기는 신분질서를 영역 구분에 적용한 것으로, 왕실은 등차적 질서론에 따라 왕기(王畿)를 설치하고 특별하게 취급함으로써 권위를 확보하려고 함.

 

   우리나라에서 정식으로 제도로서 성립된 때는 1018년(현종 9)임. 

『고려사』지리지의 왕경(王京) 개성부(開城府) 조항에 따르면, 이전부터 존속해오던 개성부를 없애고 개성현령과 장단현령(長湍縣令)을 두어 

각기 3개의 현과 7개의 현을 관장하게 하고 이를 경기(京畿)라고 부름.

 

  919년(태조 2) 개성을 중심으로 한 지역을 개주(開州)로 삼았고, 

995년(성종 14)에 당의 제도를 수용하여 개주를 개성부로 승격시키면서 개성부윤을 두어 6개 적현(赤縣)과 7개 기현(畿縣)을 관할케 함. 

적․기 13현은 개경이 위치한 송악현을 중심으로하여 그 주변에 자리잡은 개성(開城)․정주(貞州)․덕수(德水)․강음(江陰)․장단(長湍)․송림(松林)․임진(臨津)․토산(兎山)․임강(臨江)․적성(積城)․파평(坡平)․마전(麻田) 등을 소속시키고, 

경기로 불리는 12현을 관할하는 중앙관서로서 종3품 내지 정4품 정도의 지위에 있던 부윤(府尹)을 비롯한 소윤(少尹)․판관(判官)․장서기(掌書記)․법조(法曹)․참군(參軍) 등을 두어 업무를 처리. 

1018년(현종 9)에는 수도 개성을 독립시키고, 적현과 기현을 합하여 2개의 주현과 10개의 속현으로 편성하여 이를 ‘경기’라 칭하고 상서도성(尙書都省)으로 하여금 직할함.


  경기가 도(道)로서 확립된 시기는 

1390년(공양왕 2) 경기를 확장하여 좌도와 우도로 나누고 각기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士)를 둔 때부터임. 

원래의 경기 13현에 새로 31현을 합쳐 44현으로 하고, 좌두 25현, 우도 19현으로 나눔(1390년의 경기확장은 과전법을 시행하기 위한 준비의 일환임).

 

  개성이 한 나라의 수도로서 주목되기 시작한 때는 

1100여년전 궁예가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기 전인 898년부터 905년까지 8년간.

 역사의 전면에 한 나라의 수도로서 재등장한 때는 왕건이 918년 고려를 건국한 이듬해인 919년(태조 2) 정월에 송악으로 천도하면서 부터임. 

때부터 개경은 고려시대 수도로써 473년의 역사를 가진 도시로 발전.




  개경만이 지닌 특징.

1) 고대 삼국의 수도와 다른 자연환경적인 풍수지리설을 이용하였다는 점.

2) 중국의 역대 수도에서 보여지는 전조후시(前朝後市)나 좌묘우사(左廟右社)의 개념에 의해 수도가 구획되었다는 점.



  조선의 한양과 다른 점.

1) 고려는 개경이외에도 서경(西京)․동경(東京)과 남경(南京)을 배후도시로 이용(서경은 고려전기, 남경은 고려 중․말기)

2) 개경이 자연적 도시라면, 한양은 개경의 장점을 본받은 철저한 계획도시





2. 500년 도읍지 개경의 터 다지기

 

  개경은 송악산 남쪽에 자리잡은 만월대를 중심으로 한 송악군 일대와 함께 지금의 개풍군 개경리를 치소(治所)로 삼았던 개성현의 일부까지 포함하는 지역에 위치함. 

여기에 이미 축성되어 있던 송악성과 발어참성을 기반으로 궁성과 황성을 조성하여 국도(國都)로 기능함.


  919년(태조 2) 정월에 송악 남쪽에 수도를 정하여 궁궐을 건축하고,  3성(省) 6상서(尙書) 9시(寺)를 설치, 

시전(市廛)을 세우고, 방리를 구분하여 5부를 나누고, 6위를 두었다는 기록은 수도로서 위용과 기능을 다할 수 있도록 한 면모를 보여주는 것.

 

  여기에 방어상의 어려움 때문에

 다시 1009년(현종 즉위년)에 강감찬(姜邯贊)의 제의에 따라 1029년(동왕 20)에 23km의 장대한 나성(羅城 : 성문 25개로 4대문과 중문 8, 소문 13로 구성)이 완성됨으로서 최종적인 행정구역의 획정․정비가 이루어지게 됨. 

또한 내성(內城 : 8개의 문으로 구성)은 나성이 너무 커서 수도성 방어에 불리하다는 점(1377년, 우왕 3년에 논의)) 때문에 1391년(공양왕 2)에 건설을 시작하여 1394년에 완성함. 

따라서 개경의 내부구조는 결국 궁궐, 황성, 내성, 외성으로 구획되어 있으며, 이들 지역에는 주요 통로마다 여러 성문을 배치하여 물자와 인구의 출입을 통제함.


 

『고려사』에 궁전의 이름이 전해지는 것이 약 110여 개가 될 정도로 많은 전각이 건설. 

우리가 만월대(滿月臺)라 부르는 회경전(會慶殿)을 중심으로한 정궁과 장경궁, 좌춘궁, 우춘궁, 수창궁 등의 이궁․별궁들이 들어섬.

 

  정궁인 만월대는 

919년에 건설된 후 거란, 홍건적이 침입하였을 때와 이자겸(李資謙)의 반란 등으로 여러 차례 화재를 겪기도 하였으나, 

북쪽의 송악산을 배경으로 그 남쪽의 구릉지대에 위치함. 

다른 궁전들과 달리 높이 흙을 돋아 석축을 한 언덕진 곳에 자리하였음. 

이것은 이른바 ‘지기(地氣)’를 손상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지리도참설(地理圖讖說)’과도 관련시켜 설명돨 수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 궁전 중심부의 건축적 위용을 과시하려는 목적을 추구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음.

 

  만월대는 

정전인 회경전과 장화전․원덕전을 중심으로 승평문(남)․현무문(북)․동화문(동)․서화문(서) 등 4개의 문으로 구성된 입구 지역과, 

서쪽에 정전과 연결되어 조회를 받고 손님을 맞던 내전과 같은 기능을 한 선정전․건덕전을, 침전의 기능을 하였던 장령전․연영전․자화전․만령전을 건립함. 

장령전은 왕이, 만령전은 비빈들의 침실이었음. 

이밖에도 

회경전 동쪽의 수 만권의 서적을 보관하는 임천각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도서(圖書)들이 있던 보문각, 청연각 등의 건물과 

동쪽에는 좌춘궁이, 동남쪽에는 둘레 약 1km인 동지(東池)가 있었음. 

또한 만월대에는 개별적인 주요건물과 직접 연결시켜 조성한 정원과 계곡과 산봉우리를 이용하여 꾸민 유흥터들이 조성됨.

 

  만월대의 뒤 자하동, 11세기 말의 청연각 주변의 정원, 12세기 중엽 관복궁의 정원, 중미정 남지, 판적요에 있는 만춘정 주변, 

의종대 민가 50여 채를 헐어 버리고 세운 태평정․관란정․양이정․양화정과 고려말 이현(梨峴)에 있는 정원들이 대표적인 것들임.

 

  황성은 4각형 모양의 방형성임. 

궁성의 외곽 방위성으로, 중앙관청들이 있어서 나성이 완성되기까지는 외성의 역할을 하였고, 고려말에 새로운 내성을 쌓기까지는 내성의 역할을 하였음. 

『고려도경』에 의하면, 왕부의 내성에 13개 성문이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여기서 말한 내성이란 곧 황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임. 

황성에는 20개의 문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지금 11개의 문터가 알려져 있음.

 

  정문은 광화문으로 황성의 동남쪽에 위치하였고, 

궁성 쪽으로는 상서성, 추밀원․중서성․문하성과 어사대가, 앞의 대로를 ‘관도(官道)’라 하여 호부 등 6부와 각종 중요 행정관청이 자리하고 있었음. 

이러한 점은 조선의 한양과 다른 점임.

 

  이렇게 궁궐과 관아 등이 세워지고, 수많은 사원과 민가들이 들어서는 등 수도의 외형이 점차 갖추어지자, 

이를 관리할 행정조직인 부(部)와 방리(坊里)를 구획․확정함. 

????고려사???? 지리지의 왕경개성부조에는 부방리제가 완결된 형태, 

즉 5부 35방 344리의 모습을 갖추는 시기가 1024년(현종 15)으로 되어 있음. 

그러나 이때는 지역의 확대 고정에 따른 마무리 단계였고, 대체적인 틀은 고려초부터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임. 

태조 2년의 기사와 성종 6년에 ‘5부방리를 경정(更定)하였다’는 내용은 이를 뒷바침해 주는 것임.

 

  5부의 영역구성은 동부 7방 70리, 남부 5방 71리, 서부 5방 81리, 북부 10방 47리, 중부 8방 75리로 편성됨. 

이들 중 방명은 사원, 성문의 이름이나 산천 내지는 그 이외의 어떤 다른 지형들과 관련되어 붙여지고 있음.

 이 칭호들은 어떤 이유에선지 모르겠지만, 시기를 달리하여 새로운 이름으로 바뀌거나 새로이 등장하는 것도 보임. 

또한 리명의 경우, 공식적으로 행정적인 촌락으로 국가에서 파악할 때는 모부(某部) 모방(某坊) 제○리(第○里)라 표기되고 일반인 사이에는 고유명사로 혼용되어 불리어졌음. 이 역시 관청이나 궁궐 또는 사원 또는 산천 등 지형지물에서 유래한 지역적 특징을 이용한 것임.

 

  이와같은 개경의 도시구조와 행정체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경제규모의 발전과 인구팽창과 같은 문제로 영역의 확대를 필요로 하였을 것이고, 때로는 외부의 침입으로 수도의 면모가 무너지는 경우도 있었을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변화속에서 수도의 영역과 기능은 고려말까지 확대 팽창하면서 존속하였을 것임.



3. 개경의 경제생활, 지배층과 일반민의 거주 모습

 

도시는 대체로 일정한 범위의 지역 내에서 정치․경제․문화적으로 중심이 되고, 유통 조직으로서의 시장을 가지고 있으며, 상공업을 비롯한 다양한 생업에 종사하는 여러 신분 계층이 사람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곳. 

고려시대 이러한 도시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곳으로는 개경이 대표적. 물산의 집산지이며, 사회․문화의 역사적 중심지로서 개경이 지닌 의미는 그만큼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기 때문.

 

  그러면, 대도시민 으로서의 개경민은 경제생활을 어떻게 영위해 갔으며, 

또 그들은 일반 지방민과 다른 어떤 특혜를 받았고, 민들은 국가에 어떤 식으로 봉사하였을까. 

그리고 개경에 거주하는 민의 모습은 어떠하고, 인구는 얼마나 되었을까. 

이러한 의문은 당대의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닐 뿐만 아니라 도시의 제반 형태를 이해하는 과제임.

 

  개경민의 경제활동은 주로 시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짐. 

개경 시전 건물의 소재와 그 모습은『고려사』희종 4년 7월 정미의 “대시(大市의) 좌우의 장랑(長廊)을 다시 조영하였는데,

 광화문에서 십자가까지 모두 1008영(楹)에 이르렀다”는 내용은 기존의 시전을 크게 확대한 것임. 

전국 각처의 사람과 각종 물물의 유동량이 많은 여기에 때로는 국가가 차(茶)․술(酒)․음식 등을 파는 점포를 개설하여 화폐를 사용토록 하였는가 하면, 

공장과 상인들은 최대한의 이윤을 위해 저질 은화(銀貨)나 미곡(米穀)을 유통시켜 막대한 이득을 챙기기도 함.

 

  이러한 추세속에서 시장은 본래의 기능을 잃고 

‘부상(富商)’ 또는 ‘호상대고(豪商大賈)’로 불리우는 자들이 출현하여 권세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경제적 가치가 높은 물품을 확보해두고 

이를 높은 가격으로 판매하는 등의 상업활동을 통해 자신의 부를 축적. 

또한 개경내의 많은 사원들도 경제행위에 참여하여 막대한 이득을 얻기도 함. 

그리고 소상인과 도시의 부유인구(浮遊人口)에 의한 상공업 행위도 있었음. 

이들은 몰락한 나머지 농업에서 일탈하여 실업․반실업 상태에서 짚신․유기(柳器) 등을 만들고 어물․소금․땔감 등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부류들임. 

이들을 통하여 일반 중앙 관원들과 도성 거주민은 포미(布米) 등 현물이나 화폐로 자신이 필요한 물품을 매매함.

 

  초기 무인정권하에서 

권력을 쥔 무인들이 개경의 시전 거리에 있는 공장(工匠)의 집을 폭력적으로 염가에 매입한다든가, 

시전의 이익과 관련하여 청탁을 들어주지 않은 시전감독관을 위협한 일, 

공물의 대납(貸納) 등을 맡은 경주인(京主人)에 무인이 등장한 점 등은 상업의 발달이라는 측면에서 개경 중심의 대도시 유통구조의 장악이 얼마나 중요한 일임을 알려주는 것. 

결국 수도를 중심으로 한 도시유통경제는 지배층을 주요 소비층으로 한 고급상품의 제조와 판매로 특징지워지며, 정부가 필요로 하는 물품을 조달하는 장으로 기능함.

 

  한편, 중세국가의 수도는 단순한 행정도시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지배신분층인 귀족과 관료집단의 거주지이며, 그들의 정치적․경제적 특권을 유지하는 기능도 함께 지니고 있음. 중앙 집권적 체제 역시 수도를 중심으로 한 지배집단의 특권을 더욱 확고하게 보장하며, 

그것은 수도주민의 편성방식에 일정한 원칙을 적용하여 특정한 이득도 마련해 주려는 의도.

 

  예컨데, 개경의 부인(富人)들에게 

선의문(宣義門) 내의 한지(閑地)에 큰 길을 따라 기와집을 짓게 한다던가, 

국가재정이 부족할 경우에는 개경민에게 차등적으로 거두어 들이는 한편으로, 

흉년일 경우 진휼미를 우선적으로 지급해 주는 등 특별한 대상으로 파악되기도 하였음.

 

  개경은 왕경인 만큼 

나라 안의 다른 지역들에 비해 그 주민의 신분적 구성이 매우 다양. 

궁성이 왕과 왕족의 거주 구역임은 말할 나위도 없고, 고위 관료로부터 하급 관원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도성 내에 자신의 집들을 소유함.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이들 가운데 큰 집은 3~4구로 되어 있었는데, 그 면적이 몇 리에 가득찼다고도 하며, 

정함(鄭咸)의 경우는 대궐 동남쪽 약 30보 밖에 있었는데, 행랑이 무려 200칸이고 곳곳에 누각이 솟아 있고 채색이 서로 비쳤으며 그 구조는 왕궁과 비슷하였다고 할 정도로 대저택을 짓고 살기도 하였지만, 개중에는 경제여건상 집을 임대한 경우도 사료상에 보임.

 

  이들은 5부 중에서 어느 특정 부에는 거주하지 않는다든가 반대로 특정 부에만 거주하는 현상은 없었고, 각 부에 흩어져 거주. 

일반민 역시 관원들 처럼 거주상의 특별한 제약은 없었던 것으로 보임. 

다만 상공업 종사자들의 경우에는 지역적 특정상 시전이 설치되어 있는 시가지 주변에 밀집하여 거주하였을 것. 

이외에도 서리들과 군인들도 신분상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지역에 거주하였을 것.

 

  개경에는 또한 관청이나 개인에게 딸린 노비들도 많았다. 

이들은 소속관청이나 개인집에서 살기도 하고 따로 나가서 호(戶)를 이루어 살기도 함. 


종교적인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있었음. 

불교 승려의 경우, 

개경 내에 수 많은 사찰이 건립되었던 만큼 많은 수가 각 사찰에 머물고 있었을 것임. 


이외에도 도사(道士)나 무당(巫堂)도 일반 여염집 뿐만 아니라 심지어 관원과 이웃하면서 솟대를 높이 세우고 무격에 종사할 정도였음.

 

  이러한 다양한 신분 구성원이 거주하는 개경은 또한 모든 물산이 모이는 까닭에 지방 각처에서 몰려든 상인과 유람객도 상당하였을 것. 

때로는 자연재해 등으로 자신의 본거지를 떠난 유랑민과 고공(雇工) 노동자들도 상당수 거리를 배회하였을 것임. 


이들이 개경의 인구로 파악되지는 않았겠지만, 

개경의 인구에 대해서는 

1232년(고종 19)의 몽고침입에 즈음하여 강화로의 천도여부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보여지는 ????고려사절요???? 권16과 ????고려사???? 권 102 유승단전(兪升旦傳)에 보이는 ‘10만호’의 기록이 유일한 내용임. 

이외에도 개경에서 빈발했던 화재사건시의 피해 가호수가 기재되어 있음. 


이를 통하여 개경의 인구는 전통적인 방법인 1호 5인 기준으로 대략 50여만에 이를 것으로 추정함. 

논자에 따라서는 개경 성내의 면적과 비교하여 믿기 어려운 수치라고 하거나,

 성내뿐 아니라 서교(西郊)와 동교(東郊)를 비롯한 성외의 호구까지 포함한 숫자였을 것으로 봄. 


그러나 개경은 한국 역사상의 수도 가운데 가장 긴 23km의 나성을 외성으로 하고 있으며, 

1,000여호로 구성된 염점동(鹽店洞)의 경우처럼 큰 규모의 리․동도 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인구수는 가능한 것임. 

더구나 1123년(인종 원년) 고려에 왔던 서긍(徐兢)은 왕성내의 민거(民居)가 지형의 높낮이에 따랐으므로 일률적이지 못하고 마치 ‘벌집, 개미구멍 같았다’고 한 표현은 다소 과장된 것이라 할지라도 가호(家戶)가 매우 조밀했던 것을 말하여 줌.

 현재의 경우에도 개경지역은 평양, 남포에 이어 북한 제3의 도시로 꼽히며 면적은 1,200㎢로 서울(654㎢)의 두배에 해당하고, 인구는 약 38만명으로 추산함.

 



4. 조선시대 개성의 변화

 

태조 이성계는 1394년 8월 고려 문종대이래 주목을 받았던 남경(南京)으로 수도를 천도. 

천도 이유로는 개경은 구신세족(舊臣世族)의 정치적 기반이라는 점, 

풍수지리설에서 “송도(松都)는 지기(地氣)가 쇠하고 신하가 임금을 폐출하는 곳”으로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 

태조는 당연히 전 왕조의 수도를 벗어나 새 도읍에서 새로운 정치를 하여 민심을 일신시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정리하고자 하였을 것.

 

  이러한 목적에서 이루어진 한양으로의 천도는 궁궐을 짓고 관아거리를 조성하는 등 비교적 순탄하게 진행됨. 

그러나 1차 왕자의 난을 겪은 뒤 재이(災異)가 잦다는 이유로 1398년 태종에 의해서 다시금 개경으로 환도. 

태종은 여기서 6여년간을 머문뒤 한양으로 천도하자고 요청하는 아버지 태조의 뜻을 받들어 다시금 한양으로 도읍을 옮김. 


이로부터 

고려 수도였던 개경은 주요 교통로마져 한양 중심으로 바뀐 탓에 한낱 사행(使行)의 길목으로만 여겨지게 되었고, 

조선조 여유있던 사대부들이 한번 쯤 가볼만 한 유람지로 인식하게 됨.

 

  이렇게 고려의 구도로 인식된 개경은 1

394년(태종 3) 유후사(留後使)를 두었다가, 

1438년(세종 20) 개성부(開城府)로 승격시키고, 경관직인 종2품 유수(留守)를 두었다. 

이때 한성부와 개성유수부, 팔도체제로 조선초기의 지방관제가 형성됨. 


그러나 이러한 개성의 중요성은 17세기 이후 변화함. 

1627년(광해군 10) 강화부가, 1793년(정조 17) 수원이, 1795년(정조 19)에는 광주부가 각각 유수부로 승격하면서 

전국의 지방제도는 경도(京都)-사부(四府)-팔도체제로 바뀌게 됨에 따라 조선초기에 비해 비중이 약화됨.

 

  그러나 

조선시대 개성은 서울, 평양과 함께 ‘삼도(三都)’로 지칭되었을 뿐만 아니라 고려왕조의 수도였던 까닭에 문화전통에 대한 일반민이 지닌 자부심은 대단한 것. 

개성사람들은 ‘서울로 내려간다’고 할 정도로 개성사람들은 한양을 인정하려 들지 않음.

 

  때문에 개성사람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정치적으로 탄압을 받음. 

개성인과 개성지역의 차별의식의 연원은 개성 거주시 조선건국에 반대하는 세력으로 몰리는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도시의 확장과정에서 보이는 토지이용면적의 부족으로 지주층으로의 성장 가능성의 저해 등이 지적될 수 있음. 

실제로 개성은 답(畓)보다는 전(田)이 많아 개간 가능성을 지닌 농지가 절대적으로 부족. 

때문에 상업이 발달할 수 밖에 없는 요인이 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여기에는 정치적 지향성을 지닌 양반이 거주할 수 있는 조건을 상실한 때문임.

 

  성종대 이후 공식적으로는 개성인의 과거응시(科擧應試)의 금제 자격이 풀렸다고는 하나 실제로 중앙의 청직(淸職)이나 현직(顯職) 등에 나가는 것이 불가능. 황진이(黃眞伊)와의 애뜻한 사랑으로 유명한 중종대의 저명한 학자였던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이 재야의 학자로 삶을 마친 이후, 개성 출신 문인과 후학들이 중앙으로 진출하지 못했던 것은 물론이고, 명종 선조 연간의 이름난 문사(文士)였던 간이당(簡易堂) 최립(崔岦),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와 명필 석봉(石峯) 한호(韓濩) 등이 현달하지 못하였던 것도 그러한 경우에 해당함.

 

  이 때문에 

일찍이 고려의 수도로서 정치․사회․경제․문화의 중심지였던 개경은 점차 쇠락의 길을 걷게 됨. 

역성혁명에 반대한 이후 오랫동안 중앙정부로부터 소외된 개성사람은 자의든 타의든 고려(高麗)의 유민(遺民)이라는 의식 때문에 벼슬길 등 정치적 진출 뿐만 아니라 정치활동을 차단한 채 스스로의 결속으로 자구책을 마련함.

 

  따라서 이들은 그들의 활로를 농업․상업․수공업 등 생산활동에서 찾아 사족(士族) 등 지식계층까지도 상업적 농업경영이나 행상 등의 상업활동에 종사하고 

때로 그를 통해 치부(致富)에 성공하는 경우도 많았음. 

이들의 상업활동은 조선후기에는 개성상인(松商)과 그들의 전국적인 유통망(松房)의 명성에서 보듯 국내외의 상품유통과정을 장악함. 

개성지역의 경제적 번영을 배경으로하는 특이한 문화의 등장과 아울러 개성지식인의 집단의식의 성장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

 

  16세기 개성지역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자료로는 

1648년(인조 26)에 김육(金堉) 등이 편집한 『송도지(松都志)』토속조(土俗條)에는 개성지역의 상업적 면모를 볼 수 있어 주목됨. 

“남자가 10세가 되면 행상에 종사한다”거나, “사람들은 상고(商賈)를 업으로 삼으며 본전(本錢)이 없으면 대출(貸出)하여 사용한다”는 것 

등의 내용은 이 지 역에서 상업이 매우 활발했음을 보여 주는 사례임. 


이러한 사례는 

개성을 유람한 이덕형(李德泂)의 『송도기이(松都記異)』에서 

"세대(世代)가 멀어져서 고려조의 남은 풍속 이 변하고 바뀌어 거의 없어졌는데 오직 장사하고 이익을 추구하는 습관은 전에 비하여 더욱 성해졌다. 

그런 때문에 백성들이 넉넉한 것과 물자의 풍부한 것이 가히 우리나라에서 제일이라 하겠다. 

상가(商街)의 풍속은 

저울눈을 가지고 다투므로 사기로 소송하는 것이 많을 듯 한데도 순후한 운치가 지금까지 오히려 남아 있어서 문서 처리할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하였음.

 

  이중환(李重煥)의『택리지(擇里志)』에서는 

“여러 해 동안 천하의 물자를 실어 들여서 혹 수백만금의 재물을 모은 자도 있다.

 이런 자는 한양에 많이 있고 다음은 개성이며 또 다음은 평양과 안주이다. 

모두 중국의 연경과 통하는 길에 있어서 거부(巨富)가 되었는데 

이는 또한 배를 통하여 얻는 이익과 비교할 바가 아니며 삼남에도 이런 무리는 없을 것이다”라고 하여

 서울에 이어 개성에 상업으로 이익을 취한 거부가 많았음을 기록하고 있음 

이러한 기록에서 개성은 조선후기까지 계속적으로 상품유통의 거점으로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음.

 

  18세기의 학자 이익(李瀷)의 『성호쇄설(星湖僿說)』의 [생재(生財)]에서는 

“개성은 고려의 옛 서울로서 한양과 가깝고, 서쪽으로 중국의 물화를 무역하여 화려한 것을 숭상하는 풍속이 있으니, 

아직도 고려의 유풍이 남아있다 하겠다. 

조선이 건국된 뒤 고려의 유민들이 복종하지 않자, 

나라에서도 그들을 버려 금고하였으므로 사대부의 후예들이 문학을 버리고 상업에 종사하여 몸을 숨겼다. 

그러므로 손재주 많은 백성들이 많아 그 곳 물건의 편리함이 나라 안에서 으뜸이다”라 하여 

개성에 대한 차별정책으로 말미암아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음을 지적함.

 

  이러한 점은 개성지역에 문과 출신자보다 무과 출신자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서도 알 수 있음. 

송도지를 증보한 『송도속지(松都續志)』에는 

문과 출신이 10명인데 비하여 무과 출신자가 258인이나 기록되어 있음. 

이것은 이 지역 이 조선개국 이래로 출사에 있어 제약을 받은 사실을 반영하는 것임.

 

  그러나 

주자학적 이념에 입각한 조선의 명분론적 사회질서 아래에서 개성의 지도적 지식인으로 대두하였던 것은 

상인보다는 지주적 기반을 가지는 개성지역의 사족(士族)들임. 


개성의 상업도시로의 발전에 편승하여 부의 축적을 거듭하여 가던 개성인 사이에서는 

개성부근 농장에 대한 경영으로 경제적 여유를 가진 이름난 지주들이 지역유지이자 지식인충으로서 하위직이나마 관직에 진출하며, 

허함(虛啣)이나마 관직(官職)·관품(官品)을 지닌 채 개성의 지역여론을 좌우하면서 대두함. 


이들 개성 지식인들은 

개성의 경제적 번영을 배경으로 정통적 유림, 산림이나 경화거족과의 연결을 통해 조선의 학문정치가 조성했던 학문적 정치적 권위의 획득을 모색하고, 

그들간의 통혼과 교류, 학연(學綠)을 통해 개성의 지역유지로 두각을 나타냄. 

이들은 개성이 지닌 특수한 조건 속에서나마 누대에 결친 지주경영으로 그들 나름의 생활방식, 문화와 사회적 존재형태를 가지게 되었으며, 

개성을 대표하는 사족으로 중앙에는 “고도명벌(故都名閥)”로 알려지고 서울의 “경화거족(京華士族)”에 비견되는 “개성거족(開城巨族)”으로 지칭되기도 함.

 

  조선후기에 와서 

개성이 보이게 된 눈부신 발전과 번영, 그리고 개성 유력 지식인의 부상은 조선정부로 하여금 보다 적극적인 개성민심의 수습을 도모함. 


조선정부는 이들 “고도명벌”과 연결하여 주자학적 지배이념의 광포(廣布)와 함께 개성인의 반조선적 정서를 무마하는 조치를 취함. 

기존의 관학으로 성균관을 유지한 외에, 

개성인의 정신적 구심점이라 할 정몽주(鄭夢周)를 주향(主享)으로 하는 숭양서원(崧陽書院)의 건립과 사액(賜額)을 선조대에 시작하여,

 광해군대에는 서경덕을 주향하는 화곡서원(花谷書院)이 창건되어 사액받고, 

그 이후 숙종대에는 고려의 충신들을 주향하는 오관서원(五冠書院)과 도산서원(道山書院)이 건립되어 각기 국가의 사액을 받기에 이르렀던 것. 


이는 개성인의 고려 회고 정서를 인정하면서, 그를 인정하기에 이른 조선 국가에의 추종을 유도하였던 조치. 

이는 곧 조선주자학의 한 상징인 율곡(栗谷)을 전향하는 귀암서원(龜巖書院)의 건립으로 이어지고, 

잇달아 조선조에 대한 충신 송상현(宋象賢) 등을 배향하는 숭절서(崇節祠) 건립과 사액의 순서로 이어지고 있음.

 

  그런가 하면 

개성이 인삼(人蔘)의 경작 ·가공·유통으로 최고의 번영을 누리던 순조대 이후에는 

진작된 개성유림들의 유풍을 과시하듯 개성인들의 주동으로 개성학계 내 각 학통의 구심인물을 기리는 숭남사(崇南祠), 라산사(蘿山祠), 신호사(新湖祠), 남산사(男山祠), 요천사(堯泉祠) 등의 사우들이 대거 건립됨. 

이는 개성지식인들이 산림(山林)의 정통 주자학풍에 접근하고 그 학통에 포섭되어 이제 그를 잇는 여러 계통의 사족들이 각 사우를 중심으로 결집, 

개성사회 내에 각기 존재를 드러내게 되었던 것. 

 

  실상 개성의 사족 지식인들은 그간 정치적으로 중앙으로부터 소외되어 왔으며, 

또 사족이라 하더라도 지체가 낮은 부류로 치부되어 차별을 받아왔음. 

러므로

 이러한 사회적 통념 아래서 영조대 이후 

산림과 그 문하 경화사족들에의 적극적 접근과 교류는 제한적 이나마 그들의 사회적 위상을 높여줌.

 

  이들은 경제적 융성과 도시적 발달을 거듭하여 가던 개성의 중요성에 부응하여 

정치적 비중이 높은 인사들이 개성의 지방관으로 부임함에 그들과 긴밀한 교유를 맺을 뿐 아니라, 

관서 지방과 중국으로 가는 경유 교통로였던 개성에 관리들과 경화사족이 번번히 왕래함을 틈타서 그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등의 기회로 교유를 맺기도 함. 

또한, 

산림학자 문하에 나아가 공부하여 학연을 맺거나 

조선정계와 학계를 주도하게 된 경화사족과의 적극적 학문 문학 교류와 

때로는 그들에 대한 경제적 지원 등으로 그들의 경제적 위치에 상응하는 정치적 문화적 영향력을 가지려 노력을 경주하고 있었음.

 

  한편 

송상(松商)의 영향력이 의주(義州)로부터 동래(東萊)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미치고 있었던 이 시기에 

이들 중 일부 지주들은 그들의 경제력을 배경으로 전장(田莊)을 용인(龍仁)·충주(忠州) 등 다른 지방에까지 확대하여 설치하거나,

 한석호(韓錫祜)·한재렴(韓在濂)처럼 서울에 경저(京邸)를 두어 생활권을 확대하든지 

최한기(崔漢綺)처럼 아예 생활근거지를 이전해 버림. 


무과출신자들이 개성출신에 대한 차별은 우려하여 개성이 아닌 인근 지역 출신임을 칭한 것 처럼, 

개성출신이라는 것이 정치적 진출의 현실적 장애였으므로 서울이나 서울 부근의 다른 지역으로의 이동 현상은 그들의 형편이 닿는 대로 더욱 확산되어 갔음.

 

  특히 이들은 조선의 그 어느 지역보다도 서울과 인접한 도시 출신으로서 개성의 도시적 발전과 상업적 번영을 경험하고 서울과의 인적 물적 교류가 빈번하였으므로 서울로의 진출에는 가장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음. 

더욱이 인삼이 아편중독의 특효약으로 알려지는 등 중국에서 큰 명성을 얻어 수요가 폭증하였고, 조선의 가장 중요한 대외 수출품으로 등장하였던 인삼의 재배와 가공·유통이 개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므로, 개성에 인삼의 경제적 이익이 집중되던 순조대 이후, 그 이권을 둘러싸고 어떤 식으로든 여기에 개입하였던 서울의 경화거족과 관료, 상인, 서리 등과 관련하여서도 개성인들의 서울진출은 더욱 확대될 수 밖에 없었음.

 

  그러나 세도정국 하에서 개성인은 그들의 실력과 집요한 정치적 진출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앙정계의 소외와 사회적 차별을 맛보아야 했음. 

그런 분위기에서 개성 지식인들은 고려고도인 으로서의 자의식이나 역사의식을 환기하게 되었음. 

한재렴(韓在濂)의 『고려고도징(高麗古都徵)』이나 임효헌(林孝憲)의 『송도광고(松都廣攷)』등이 그러한 예임. 


특히 삼포(蔘圃) 경영을 하던 지주집안 출신 김택영(金澤榮)은 그의 실력을 인정받아 사관(史官)으로 입신하여 개성인으로 드물게 중앙 관료로 진출하였지만, 

세도정치기의 부패한 정치상황에 무력감과 소외감을 느끼며 35세의 나이에 울분을 토하며 개성의 북쪽 고덕리(古德里) 골짜기에서 저술한 『숭양기로전(崇陽耆老傳)』은 바로 그러한 정황을 엿볼 수 있는 것.

 

  개성 지식인들은 개성의 역사적 전통을 정리하는 가운데 개성인 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끼며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사상적 태도를 견지하고 

이는 때때로 조선의 사회 정치상황과 체제에 대한 비판 의식으로 전개되기도 함. 

때문에 그들의 입장에서 북학풍과 문풍을 정리하여 조선 학풍·문풍의 정통적 위치로까지 올려놓은 

개성출신인 최한기(崔漢綺 1803~1877)· 이조헌(李祖憲1796~?)· 김택영(金澤榮 1850~1927) 등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遠)의 북학사상을 계승 발전시키는 일단의 역할을 수행함.

 

  개성지역은 조선후기부터 북학파가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준 곳이었기 때문에 

여타의 다른 지방도시보다 서구의 문명을 빨리 수용할 수 있었음. 

더구나 이 지역은 다른 도시에 비하여 일찍부터 개신교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개화에 대한 변화의 수용에 별 거부감이 없었음. 

이러한 점은 조선시대에 보여주었던 개성민과 개경상인이 지닌 소외의식에서 나타난 독특한 활달하고도 능동적인 자세가 저변에 깔려 있었던 데 연유함.

 

  그러나 

일제시대 개성은 개성상인의 경제권을 장악하려는 식민수탈의 전형을 보여주는 곳의 하나이기도 함. 

조선총독부 주도하에 홍삼전매권(紅蔘專賣權)을 탈취하는 등 일제가 적극적으로 개경의 상업권을 장악하려고 노력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 많은 사찰 문화재의 약탈은 물론이고, 고려 왕릉까지 도굴당함. 

이 때문에 귀중한 고려시대 개경의 유적유물은 무참히 파괴되어 그 모습조차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음. 

이후 개성인들의 노력으로 개성보존회(開城保存會)라는 것을 조직하여 문화재를 보호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고, 

서울지역 외에의 평양·경주·부여 등 삼국의 고도와 함께 개경에 개성박물관이 들어설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러한 노력이 바탕이 되었을 것임. 

그러한 자부심은 고유섭(高裕燮)의 『송도의 고적』에도 충분히 반영되었을 것임.

 

  그러나 8․15 해방과 더불어 한반도의 중심에 있던 개성은 미국과 소련에 의해서 3·8선이 그어지고 남한 쪽에 속하게 되어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한국전쟁의 발발로 개성은 열강의 이데올로기의 대결과 힘의 각축장이 됨. 

그 결과로 고려시대 수도였던 개성은 그 흔적조차 기억하기 힘들정도로 전쟁의 참화를 입음. 

심지어 만월대가 미군의 야전병원을 건설한다는 구실아래 불도저로 밀어버리는 일을 당할 정도였음. 

한국전쟁의 초기에는 개성이 전선에 위치에 있었던 까닭에 미군의 폭격으로 모든 건물이 사라지는 참혹한 일을 당함.

 전쟁의 막바지에는 정전협상이 진행된 곳도 개성의 고려동(高麗洞)에서 진행되었으며, 나중에는 판문점에서 휴전회담이 이루어짐. 

결국 열강의 비무장지역의 설정으로 개성은 북한 지역으로 편입되었고, 이후 이산가족이 제일 많은 도시가 됨.

 

  조선시대 이후 멀어져간 신비의 ‘은빚도시’라 이름지어진 고려시대 수도인 개경은 다시 그 찬연한 빛을 발휘.

 몇해년 이루어졌던 금강산 뱃길이 이제 경제특구와 관광특구로 지정된 개성의 기차길로 통일의 관문이 바뀌어 지고 있음. 

이제 꿈속의 상상에서나 보일 듯 말 듯 한 개경이 눈 앞의 현실속의 ‘통일’로 이어주는 건널목이 되어감. 

우리가 찾아갈 개경땅은 이미 발아래 밟고 있는 것은 아닐까….




5.  개성의 문화재 현황

 

개성 일대는 오랜 기간 동안 고려왕조의 수도였기 때문에 많은 고려시기 문화재가 분포함. 

즉 개성 일대에는 나성 발어참성 내성 등 성곽, 만월대 등 궁궐터, 수많은 왕릉, 절터, 관청터 등 유적지가 널려있음. 그

렇지만 북한의 문화재 종합목록이 없기 때문에 그 전모를 파악할 수 없음.

 

  최근까지 문화재관리국에서 간행한 북한 문화재 관련 서적을 토대로 추정하면 

개성주변의 문화재는 릉 31, 기타 분묘 20, 성(곽) 19, 궁터 8, 절터 53, 탑 8, 부도․비 6, 불상 1, 당간지주 2, 정각 8, 서원향교 3, 가마터 1, 기타유적 33건으로 모두 193건에 이르며, 

이 중 상당수는 고려시기의 것임. 

이것은 체계적인 종합목록을 토대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확하지는 않지만, 개성과 개성주변의 문화재의 대체적인 추세는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음.

 

  북한은 남한과 마찬가지로 문화재를 국보급, 보물급, 사적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1984년까지 국보급은 50, 보물급은 53, 사적은 73 등 모두 176개의 문화재가 지정되어 있음. 


그 중 국보급이 

개성 남대문(34), 불일사5층탑(35), 선죽교(36), 영통사5층탑(37), 영통사서3층탑(38), 공민왕릉과 정릉(39), 현화사비(40), 현화사7층탑(41) 등 8개, 

보물급이 

연복사종(30), 흥국사탑(31), 개국사석등(32), 관음사(33), 화장사 사리탑(34), 영통사동3층탑(35), 영통사대각국사비(36), 영통사당간지주(37), 현화사당간지주(38), 탑동3층탑(39) 등 10개, 

사적이 

나성(46), 반월성(47), 만월대(48), 고려첨성대(49), 성균관(50), 숭양서원(51), 대흥산성(52), 현릉(53), 7릉(54) 등 9개로 모두 27개의 문화재가 지정되어 있음.



1). 성곽과 문루

  성곽은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주민과 내부시설을 보호하기 위해서 흙이나 돌로 높이 쌓아올린 큰 담이다. 

개성의 대표적인 성으로는 사적으로 지정된 나성, 반월성(내성), 대흥산성, 지정되지 않은 발어참성터가 있다. 


그 중 고려시기 개성을 상징하는 성곽은 사적 46호로 지정되어 있는 나성이다. 

나성은 고려 건국 후 약 100년 정도 후인 1020년(현종 11)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추진되어 1029년에 완성되었다. 

둘레는 약 23킬로미터로 조선시기 한양 도성의 18킬로미터보다 더 길다. 

본래 나성은 흙으로 쌓았다. 

????고려사???? 지리지에서 25개의 성문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 중 4대문은 동쪽의 숭인문과 서쪽의 선의문, 남쪽의 회빈문과 북쪽의 태화문(북성문)이었다. 

나성에 성문이 많은 것 역시 조선시대 한양의 도성과 다른 점인데, 

지금 제대로 남아있는 나성의 성문은 하나도 없으며, 북창문과 북소문 등 내성(반월성)과 겹치는 부분의 일부 성문이  누각 없이 돌문만 남아있다.

 

  나성이 만들어지기 이전 발어참성과 황성이 확인된다. 

발어참성은 

896년 후고구려 때 송악산 기슭에 쌓은 것으로 898년 후고구려가 개성을 수도로 삼으면서 도성의 기능을 하였으며, 

고려 건국후 궁성을 둘러싼 황성의 토대가 되었다. 

????고려사???? 지리지에서는 광화문을 비롯한 20개의 황성문이 확인되지만 역시 지금 남아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황성은 현종 초 거란의 침입으로 파괴되었으며, 그 후 나성이 축성되면서 완전히 복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남아있는 발어참성터는 황성의 동쪽 정문인 광화문 근처의 흔적으로 생각된다.

 

  한편 개성에는 사적 47호로 지정된 반월성 곧 내성이 있는데, 

1393년(조선 태조 2)에 완성되었다. 

이 성곽이 축성된 것은 당시의 국력으로 규모가 큰 나성을 방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내성의 규모는 둘레가 11.2킬로미터로 나성의 반 정도였다. 

황성과 나성이 토성인 것과 달리 내성은 돌로 쌓은 석성이었다. 

내성의 북쪽과 서쪽 면은 나성 성벽을 이용하여 쌓았기 때문에 그 겹치는 나성의 서쪽과 북쪽의 일부 성벽은 석성으로 남아있다. 

내성에는 본래 7개의 성문이 있었는데, 문루가 복원되어 남아있는 것은 남대문 하나이며, 서쪽의 눌리문 등은 돌문만 일부 남아있다.

 

  지금 개성 문화재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개성 남대문은 개성시 북안동에 있다. 

이 곳은 개성의 중심지인데, 고려시기 개경의 중심도로인 십자로가 지나갔다. 

남대문은 

내성이 완성되는 해인 1393년에 완성되었고, 

한국전쟁 때 완전 파괴되었다가 1955년에 복원하였다. 

그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안팍 3포의 합각식 건물로 되어 있다. 

남대문의 현판은 조선전기의 명필인 한석봉의 글씨로 알려져 있으며, 

남대문 문루에는 보물급 30호로 지정된 연복사종이 걸려있다. 

연복사종은 1346년(충목왕 2)에 만들어져 연복사에 걸렸는데, 조선 중기 연복사가 화재로 없어지자 근처의 남대문에 옮겨 달았던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연복사종은 

우리나라 5대 종의 하나로 일컬어지는데, 모양과 무늬 등이 다른 것과 다르다. 

종의 몸체는 여러 줄의 굵은 선으로 아래 위 두 부분으로 나뉘어졌으며, 불상과 불경 및 여러 가지 문양과 종 이름 등이 새겨져있다.

 연복사는 본래 919년 고려 태조가 수도를 철원에서 개성으로 옮긴 후 도내에 창건한 10찰 중의 하나였다. 

선종 사찰인 연복사의 당시 이름은 보제사였으며, 위치는 남대문보다 조금 남쪽에 있었다. 

조선시기에 유람객이 개성에 오면 연복사에 가는 것을 빠뜨리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것은 5층층각이 있어서 그곳에 올라 도성을 굽어볼 수 있었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연복사가 불에 타 없어진 이후 연복사종이 걸린 남대문이 대신 개성 시가지를 내려다보는 망루 기능을 하였는데, 조선시기에 남대문에서 서남쪽을 바라보면 연복사탑이 보였다고 한다.

 

  개성의 성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사적 52호로 지적된 대흥산성이다. 

대흥산성은 

개성의 배후산성으로 조선시기 한양의 북한산성과 같은 기능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처음 축성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대흥산성은 천마산과 성거산의 골짜기를 끼고 축성된 포곡식 산성으로 둘레는 약 10.1킬로미터이다. 

이 곳에는 4개의 큰 문과 사이문이 있는데 그 중 북문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 

또한 4개의 수구문이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송도삼절의 하나인 박연폭포를 이루는 북쪽 수구문이다. 

그리고 대흥산성에는 대흥사와 관음사가 있는데, 

그 중 관음사는 보물급 33호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이 외에도 개성의 동남쪽에 흥왕리성지, 덕물산성지, 덕수리성지 등의 성터가 남아있다.




2). 만월대와 성균관

  뭐니뭐니해도 개성의 핵심 문화재는 궁궐이 되어야 한다. 

궁궐은 왕과 왕실의 거처이자 정치와 행정이 행해지던 곳, 곧 나라의 최고 관청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개성의 문화재는 알맹이가 빠진 것이나 다름이 없다. 궁궐이 남아있지 못하고 터만 있기 때문이다. 


고려의 궁궐터를 흔히 만월대라 하는데, 사적 48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려의 본대궐인 만월대 궁궐은 황성의 아래쪽에 자리잡은 궁성 안에 있었다. 

이것은 북쪽의 송악산을 배경으로 그 남쪽의 구릉지대에 전개되어 있다. 

경복궁을 비롯한 조선시대 궁궐이 대체로 평지에 건설된 것과 달리 흙을 높이 돋아 석축을 한 언덕진 곳에 자리잡은 것이 만월대 궁궐의 특징이다. 

이것은 이른바 ‘지기(地氣)’를 손상시키지 않으려는 의지와 관련시켜 설명될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궁전 중심부의 건축적 위용을 과시하려는 목적을 추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황성의 남문인 주작문을 지나고 궁성의 남문인 승평문을 들어서면 구정이 나오고, 

구정을 지나면 다시 신봉문이 나오며, 신봉문을 지나면 본대궐의 중심전각인 회경전의 문인 창합문이 나오며, 

회경전은 4개의 33단 돌계단 위에 놓여졌다. 


궁성 안에는 

중심전각인 회경전을 비롯하여 수많은 전각과 관청들이 널려있었지만, 

지금은 신봉문터, 창합문터, 회경전터, 장화전터, 중관전터의 주춧돌이 풀 숲에 누워 전각이 복원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만월대 법궁은 

919년(태조 2)에 건설된 이후 현종대의 거란 침입, 인종대 이자겸의 난, 고종대 몽고 침입 등을 겪으며 여러 차례 소실과 중건을 반복하였고, 

공민왕대 홍건적의 침입 때 불에 탄 후 지금까지 복원되지 못하고 있다. 

궁궐이 불에 탄 것은 1362년(공민왕 11)인데, 그 후 만월대 궁궐은 재건되지 않았다. 

공민왕은 1365년 왕후인 노국대장공주가 죽자 수년간 많은 물자와 노동력을 무리하게 동원하여 정릉 조성공사를 벌이면서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불에 타 폐허가 된 궁궐은 손볼 겨를이 없었음에도 왕후의 추모사업에는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공민왕의 행동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결국 고려 본 대궐터는 

원천석이 조선초에 ‘세월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秋草)로다’ 라고 묘사하였듯이 이미 풀숲에 묻혀있었다. 

조선시기에 이곳의 너른 마당이 여러 행사 장소로 이용되었음은 조선후기 김홍도의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개성역사박물관에는 

만월대 궁궐의 모형이 만들어져 전시되고 있는데, 이것을 토대로 문경에 개경궁궐을 만들어 놓고 역사드라마 ‘태조 왕건>을 촬영했다. 

그리고 만월대 서북쪽에는 사적 49호로 지정된 고려 첨성대가 있다. 

이것은 고려시기의 천문대로 알려져 있는데, 지금은 화강암으로 다듬어 만든 축대부분만 남아있다.

 

  만월대 법궁 외에도 많은 이궁의 이름이 전하지만 현재 위치가 확인되는 것은 많지 않다. 

공민왕 후반 이후 조선의 태조와 태종이 즉위하였던 수창궁과 

이성계가 즉위하기 전에 살았던 경덕궁(목청전)은 그 터가 남아있지만 지금 어떤 상태인지 확인할 수 없다.

 

  고려시기 개경에는 많은 관청이 있었지만 지금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사적 50호로 지정된 성균관뿐이다. 

지금 성균관는 개성시 선죽동에 있다. 

이 곳은 본래 문종대 대명궁이라는 별궁이 있었는데, 순천관 숭문관 등으로 변천되어 오다가 1310년(충선왕 2) 성균관으로 중영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특히 고려말 개혁에 앞장섰던 신진사대부들이 이곳에서 성장하였다. 

건물은 남북 중심축을 따라 앞에 명륜당이, 뒤에 대성전이 배치되었다. 

이곳에는 고려에 성리학을 전한 안향이 중국에서 직접 가져온 여러 현인들의 인물상이 있다. 

현재 개성역사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는 성균관에는 개성 근처에서 발굴된 여러 가지 유물들을 모아 전시하고 있으며, 

뜰에는 주변의 절터에서 가져온 탑들이 모여있다.




3). 왕릉, 무덤

  개성시를 중심으로 개풍군 판문군 일대에는 고려 역대 왕과 왕비, 그리고 왕족들의 무덤이 많다. 

왕릉의 경우, 

강화에 있는 2기(희종 석릉, 고종 홍릉)와 위치가 확실하지 않은 3기(우왕 창왕 공양왕)를 제외한 29기가 개성 일대에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의 왕릉 중 위치가 확인되는 것은 강화의 2기를 포함하여 모두 19기에 불과하며, 

북한에서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국보급 39호로 지정된 공민왕 현릉(玄陵; 정릉 포함)과 

사적 53호로 지정된 태조 현릉(顯陵), 54호로 지정된 고려 7릉군뿐이다.(장호수, 2000, 「개성지역 고려왕릉」 ????한국사의 구조와 전개???? 혜안)

 

  개성에 있는 고려 왕릉의 무덤구역은 크게 네 단으로 나누어 돌계단으로 연결하였다. 

첫째단에는 

봉분과 그 둘레에 돌짐승을 두고 앞에는 좌우로 망주석을 세웠다. 봉분 둘레에는 병풍석을 두루고 병풍석 주위로 1미터 정도 밖에는 돌난간을 세웠다. 

돌난간 밖에는 4 방위에 돌짐승상을 두기도 한다. 

태조 왕건릉, 공민왕릉의 병풍석에는 각 방위에 따라서 12지상을 새겼다. 


둘째단에는 정면에 장명등을 세우고 그 좌우에 문관상을 세웠으며, 

셋째단에는 무관상을 세웠다. 

초기왕릉에는 문관상만 배치되었지만, 후기 왕릉에는 무관상도 함께 세웠다. 


마지막단은 약간 넓어지면서 장자각과 능비를 세웠다. 

무덤형식은 돌칸흙무덤(석실봉토분)으로 발해와 통일신라기의 형식과 같다. 

내부구조는 대체로 외칸무덤(단실분)으로 평천정구조이다. 

안칸 바닥 가운데 관대가 놓이고 그 위에 나무로 만든 관이 놓였다. 

네 벽과 천장에는 벽화가 그려진 것이 있는데, 왕릉 가운데 벽화가 있는 것은 모두 7기가 확인되었다.

 

  개성시 개풍군 해선리 만수산에 있는 태조 현릉(顯陵)은 태조가 죽은 943년(태조 26) 5월에 만들어졌는데, 신혜왕후 유씨가 함께 뭍혀있다. 

현릉은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몇차례 이장 경험을 가지고 있다. 

즉 현종 9년 거란이 침입하자 부아산 향림사로 옮겼다가 다음해 11월 다시 환장하였으며, 

고종 4년 거란족이 국경에 침입하자 태조의 재궁(관)은 다시 봉은사로 옮겨졌다. 

또 고종 19년 강화로 천도하면서 현릉은 다시 강화로 이장되었으며, 

개경으로 서울을 옮긴 원종 11년에 임시로 이판동에 옮겼다가 충렬왕 2년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이것은 또한 1906년(고종43) 도적들에 의해 파헤쳐진 적이 있었으며, 

1950년 한국 전쟁 중에 파괴되었으나 1954년 복구하였는데, 

1992년 북한에서 발굴조사 후 새로 고치고, 1993년 5월 5일 ‘고려태조왕건왕릉개건비’를 세웠다. 

이 때 12지상을 새긴 본래의 병풍석들은 무덤 안길에 넣어 보존하고 있다. 

 

  북한에서 발굴할 때 

여러 가지 유물이 나왔는데, 그 중 금동불상은 등신불로서 현재 개성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무덤안칸에는 벽화를 그렸는데, 

동벽에 매화나무, 참대, 청룡이, 

서벽에 소나무, 매화나무, 백호, 

북벽에 현무, 

천장에는 8개의 별이 그려있다.

 

  국보급 문화재 39호로 지정된 공민왕 현릉과 왕비릉인 정릉은 개성시 개풍군 해선리 정릉동 봉명산 기슭에 있는데, 태조 현릉보다 서쪽에 있다. 

잘 알려진 대로 1365년 공민왕의 왕후인 노국대장공주가 죽자 공민왕은 직접 정릉을 만들었으며, 

1372년에 자신의 사후를 위하여 현릉을 만들어 두었다가 1374년 그곳에 묻혔다. 

공민왕은 여기에 당대 최고의 기술 및 최대의 비용과 인력을 동원하였다. 

현릉과 정릉은 1905년 경 도굴된 적이 있고, 

1920년에 일부 수리공사를 하였으며, 

1956년 개성시 문화유물보존위원회에서 다시 수리공사를 하면서 내부조사를 실시하였다. 

이 때 무덤구조와 내부시설을 조사하고 벽화를 옮겨 그렸다.

 

  공민왕의 현릉의 벽에는 12지상 그림이 한 벽에 4쌍씩 그려져 있다. 

병풍석에 그린 12지상과 같은 모습으로 공민왕이 직접 그렸다고 전한다. 

천장에는 해와 북두칠성, 3성 그림이 있으며, 안칸 동벽에는 문을 그리고, 그 밑에 네모난 구멍을 뚫어 정릉과 통하게 되어 있다. 

동쪽으로 좀 떨어진 곳에는 원찰로 세운 광통보제사의 보제선사비가 세워져있는데, 여기에는 광통보제선사와 공민왕릉의 내력이 적혀있다. 


한편 태조 현릉 주변에는 사적 54호로 지정된 고려7릉군이 있는데, 

그 주인공은 확인되지 않았다. 최근의 보고에 의하면 7릉 중 6곳은 왕릉급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4). 불교문화재

  고려시기 개경에는 개경을 불교도시라 일컬을 정도로 수많은 절이 있었다. 

조선중기의 한 기록에는 유명한 절만도 성내에 300곳이 있었다고 하였으며, 현재 절 위치와 창건연대를 확인 할 수 있는 것만도 30여 개가 넘는다. 

또한 고려시기의 절은 종교적인 기능만을 하는 장소가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으로도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남아있는 불교문화재는 그리 많지 않다. 


먼저 지정문화재를 살펴보자. 

현재 북한에서 지정된 개성주변의 불교문화재는 

국보급으로 지정된 불일사5층탑(35), 영통사5층탑(37), 영통사서3층탑(38), 현화사비(40), 현화사7층탑(41)와 

보물급으로 지정된 연복사종(30), 흥국사탑(31), 개국사석등(32), 관음사(33), 화장사 사리탑(34), 영통사동3층탑(35), 영통사대각국사비(36), 영통사당간지주(37), 현화사당간지주(38), 탑동3층탑(39) 등 모두 15개이며, 

이중 영통사와 관련된 것이 5개이고 현화사와 관련된 것이 3개이다. 또 형태로는 탑이 7개로 가장 많다.

 

  가장 많은 지정문화재를 남긴 영통사는 

개성 나성밖 동북쪽인 개성시 용흥리 오관산 남쪽에 있다. 

이것은 고려초에 창건된 절로서 고려전기 화엄종단의 대표적인 절이다. 

절터에는

 현재 국보급으로 지정된 영통사5층탑(37), 영통사서3층탑(38)을 비롯하여 

보물급으로 지정된 영통사동3층탑(35), 영통사대각국사비(36), 영통사당간지주(37)가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3기의 석탑은 모두 고려초기의 것으로 5층탑을 가운데 놓고 좌우에 3층탑이 동서로 서있다. 


또 영통사지에는 보물급 36호로 지정된 영통사대각국사비가 있는데, 

이 비는 1125년(인종 3)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의 행적을 기록 한 것이다. 

이 비문은 김부식이 지었으며 이 비문을 통하여 화엄승려로서의 의천의 활동을 파악할 수 있다. 


한편 의천의 비는 경상북도 칠곡군의 선봉사지에도 있는데, 

선봉사대각국사비는 영통사대각국사비보다 7년 늦은 1132년에 세워졌다. 

채충순이 쓴 이 비문에는 천태종 개창자로서의 의천의 모습이 드러나 있다. 


이렇듯 1명의 승려에 2개의 비문이 전하는 것은 희귀한 예인데, 

이는 천태종 개창을 통해 선종을 통합하고 교종인 법상종을 견제하여 당시의 불교계를 재편하려고 했던 화엄종 승려 의천의 활동과 관련이 있다. 

이외에도 의천이 입적한 해인 1101년에 작성된 묘지명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현재 영통사지는 남한 불교계의 지원으로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발굴을 통하여 영통사의 전모가 드러나길 기대한다.

 

  영통사지에서 멀지 않은 개성시 월고리 영취산 아래에 있는 현화사지에도 주요 문화재가 남아있다. 

현재 현화사와 관련된 지정문화재는 

국보급인 현화사비(40), 현화사7층탑(41)과 

보물급인 현화사당간지주(38)가 있다. 

이 중 현화사7층탑은 현재 개성시 역사박물관 주변에 옮겨져있다. 


현화사는 현종이 자기 부모의 원찰로 지은 법상종 계통의 절이다. 

현종은 1018(현종 9)에 국력을 기우려 현화사를 창건하고, 많은 토지와 노비를 제공하였다. 

1021년에 건립된 현화사비는 채충순이 썼는데 여기에는 현화사의 창건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현종대 현화사에는 토지가 2000경, 노비 100구를 비롯하여 많은 물자들이 있었으며 학도들이 1000명이 넘었다. 

현화사 창건 내력을 적은 비 앞면의 위 부분에는 해와 달을 상징하는 까마귀와 토지 조각이 있으며, 비 양 옆면에는 용이 새겨져있다. 

개성시 방직동 역사박물관 옆에 옮겨진 현화사 7층석탑은 1020년에 만든 것으로 고려초기 석탑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현화사탑에는 탑신받침이 있고, 각층 탑신의 4면에는 감실형태로 판 안상 안에 불상과 보살상이 조각되어 있다.

 

  한편 현화사7층탑이 있는 개성시 방직동 역사박물관 주변에는 

현화사7층탑 외에도 불일사5층탑, 흥국사탑, 탑동 3층탑 등 불탑과 원통사부도가 모여있는데, 

흡사 서울 경복궁 앞의 중앙박물관 뜰 안에 여러 곳의 석탑과 부도가 모여있는 것과 같다. 


불일사는 

951년 광종이 자기 어머니 원찰로 세운 것으로, 개성시 판문군 선적리 보봉산 기슭에 그 터가 있다. 

1959년 발굴하였으며, 그 다음해 불일사5층탑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불일사5층탑은 개성주변에 있는 대표적인 고려초 석탑으로서 국보급 35호로 지정되었다. 

불일사5층탑을 옮길 때 

불일사탑에서는 금동9층탑, 금동5층탑, 금동3층탑, 작은 돌탑 20여개, 작은 청자 사리단지, 불경 등 많은 유물이 나왔는데, 그

것들은 지금 개성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또 이 주위에는 흥국사탑도 있다. 

흥국사는 924년(태조 7)에 개성의 중심부에 세운 절인데, 

법왕사 봉은사 민천사 등 개경 중심부에 위치하였던 다른 절과 마찬가지로 주요 국가차원의 불교행사를 주관하였으며, 정치공간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또한 흥국사는 

고려 신종 초 최충헌의 노비 만적이 난을 일으킬 때 거사장소로 정하기도 하였다. 

흥국사탑에는 글이 새겨져있는데, 이에 따르면 이 탑은 강감찬이 1021년 거란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기념으로 세운 것이라 한다. 

이 탑은 2층부터 탑신이 없어져서 지붕돌만 포개놓은 불완전한 상태이지만 새겨진 글에서 탑을 세운 연대를 알 수 있기 때문에 고려초기 석탑 연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개국사 석등 역시 역사박물관 주변에 있는 주요 불교문화재이다. 

개국사는

 935년 개경의 동남쪽에 창건되었는데, 이곳은 나성의 장패문 바로 바깥으로, 당시 개성에서 동남쪽으로 내려가는 길목이었다. 

따라서 개국사는 고려초 동북쪽에 창건한 현성사와 함께 개경의 관문에 위치하여 개경의 안팎을 연결하고 더 나아가서 개경을 방어하는 중심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개국사 석등은 

높이가 4미터에 가까운 커다란 석등으로 4각기둥 모양을 한 전형적인 고려초기의 석등이다. 

개국사에는 본래 7층탑도 있었는데, 이 개국사석탑은 일제강점기에 서울로 옮겨져 현재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뜰에 남계원 석탑의 이름으로 보존되어 있다. 

남계원은 고려시기 개국사에 속했던 원(院)으로 장패문 안에 있었다. 

개국사가 개경에서 동남쪽으로 내려가는 교통의 요지에 있었기 때문에 개국사에서 남계원을 설치한 것이다.

 

 고유섭에 의하면 

지금 경복궁 뜰에 있는 석탑은 장패문 밖의 개국사터가 아니라 장패문 안의 남계원터에 있었던 것이라 한다. 

이와 함께 개성의 불교문화재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경천사10층탑이다. 

경천사는 1113년(예종8) 나성의 남쪽에 세운 절인데, 이곳 역시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있었다. 


경천사10층탑은 

원간섭기에 원 불교의 영향 속에서 만들어진 탑으로서 얼마 전까지는 경복궁의 뜰에 세워져 있었다. 

이렇게 개성의 역사박물관이나 서울의 중앙박물관 등에 불교문화재가 모이게 된 것도 일제강점기의 유산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위치를 확인할 수 없거나 현지에서 보호하기 어려운 문화재는 박물관으로 옮기는 것이 마땅하지만, 

가능하면 제자리를 찾아주는 것도 이제는 생각해 볼 만한 일이다.

 

  보물급 34호로 지정된 화장사 사리탑도 간단히 소개할 필요가 있다. 

이 부도는 개성시 용흥리 화장사터에 있는데, 고려말에 만든 것으로 우리나라 종모양 부도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 부도 몸돌 앞면에 ‘지공정혜령조지탑’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어서 이것의 주인공이 지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시기 개성에 수많은 절들이 있었지만 이렇듯 남아있는 불교문화재는 몇 기의 석조물이 전부이다. 

그 가운데 개성시 산성리 대흥산성 안에 있는 관음사는 그 자체가 보물급 33호로 지정되었다. 

이는 개성의 절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조선후기의 절 집이 지금까지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 개성에는 복원된 절은 관음사와 안화사 등 극소수에 불과하며 그것도 제대로 복원된 것은 아니다. 

관음사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7층탑 등의 유적이 있는데, 이 중 관음전 대웅전은 남한에서도 문화재로 지정하였다.

 

  지정된 문화재는 아니지만 

흥왕사지와 천수사지(천수원지)를 불교문화재와 함께 소개할 필요가 있다. 


흥왕사지는 개풍군 봉동면 흥왕리에 있는데, 

이곳은 1067년(문종 21) 문종이 덕수현의 치소를 옮기고 대대적인 지원 끝에 창건한 화엄종 계통의 절인 흥왕사가 있던 곳이다. 

이곳에는 1070년 성을 쌓았는데 지금도 성터가 남아있다. 

흥왕사는 고려시기 남쪽의 이궁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천수사지는 장단군 진서면에 있는 고려 예종대에 지은 천수사가 있던 곳이다. 

이곳은 개성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교통의 요지였으며, 조선시기에는 이곳에 천수원이 있었다. 

이 두 곳은 현대아산이 추진하는 공단지역과 인접하고 있는 지역이다.



5). 선죽교와 숭양서원

  고려충절의 상징처럼 되어 있는 선죽교는 개성시 선죽동에 있는 고려시기의 돌다리이다. 

이곳에서 고려말 정몽주가 피살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다리의 옛 이름은 선지교였는데, 

정몽주가 피살된 날 밤 다리 옆에 참대가 났기 때문에 이름을 선죽교로 고쳤다고 한다. 


선죽교에는 본래 난간이 없었는데 

지금 있는 난간은 정몽주의 후손으로 1780년 개성 유수로 있던 정호인이 사람들이 다니지 못하게 하여 다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설치한 것이다. 

선죽교는 국보급 36호로 지정되었으며, 그 옆에는 한석봉이 썼다고 전하는 ‘선죽교(善竹橋)’라고 쓴 비석이 있다. 

또한 이 다리 주변에는 정몽주와 관련된 유적들이 많이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숭양서원과 표충비이다. 


사적 51호로 지정된 숭양서원은 정몽주의 집 자리에 세운 서원이다. 

서원은 조선중기이후 본받을만한 유학자를 제사지내는 동시에 유학공부를 시켰던 일종의 사립학교이다. 

숭양서원에는 정몽주의 위패가 모셔져있다. 


또 근처에는 조선후기 이후에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는 표충비 2개가 비각 안에 들어있는데, 

북쪽 것은 1740년 영조가, 남쪽 것은 1872년 고종이 개성에 와서 그의 충절을 기린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 참고문헌 】

고유섭『송도의 고적』1977 열화당(1945년 초판)
송경록『개성이야기』2000 푸른숲
박용운『고려시대 개경연구』1996 일지사
홍영의「고려 수도 개경의 위상」1998『역사비평』45
박종진「고려시기 개경사 연구동향」『역사와 현실』34 1999
홍영의「고려전기 개경의 오부방리 구획과 영역」『역사와 현실』38 2000
박종진「고려시기 개경 절의 위치와 기능」『역사와 현실』38 2000
신안식「고려전기 충성과 개경의 황성」『역사와 현실』38 2000
박종진「개성의 문화재」『역사비평』54 2001
한국연구사연구회 개경사반『고려의 황도 개경』2002 창작과 비평사
김창현『고려 개경의 구조와 그 이념』2002 신서원
외 다수

 

출처 [우리문화사랑방] 개성의 역사와 남겨진 문화재 
 <한국의재발견> 2005.07.16 18:59 


 

문헌록 준비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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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사일정 준비중

      개부파의 유래

개부파(開府派)는 
15세  高敞縣監公 諱 평(坪)의 子 인 16세 諱 대년(大年)이 派祖이시며
17세 諱 억중(億中), 18세 諱 덕사(德思)까지 경남 함양에 거주 하시다가
19세 諱 인(仁)께서 개성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신 이래로 개성이 세거지가 되었다.


[고창공 비석 탁본]


[고창공 墓碣]
통훈대부 행 고창현감 무안박공 평 의 묘
숙인 성산이씨 부좌

공의 자는 휘지, 호는 묵재이다. 시조 휘 진승은 고려국학으로 무안군에 봉해졌고, 10세 휘 의룡은 공의 5대조이니 이조 개국정사공신 형조판서를 지내시고 무안에 있는 병산서원에 향사하였다. 고조 휘 강은 형조참판을 지냈고 증조 휘 형은 지단양군사로 증 호조참판이요, 조부 휘 이는 평강현감에 증 병조참판이요, 부친의 휘는 임경이니 여러고을(주, 목)의 수령을 거쳐 자헌대부 이조 판서를 추증 받았다. 모친 연안김씨는 일찍 세상을 뜨고 창령성씨는 매죽헌 삼문의 따님이다.
공은 천순 무인년(세조4년: 1458년)에 탄생하니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하였으며  학식이 출중하고 드높은 지조와 청고한 문장으로 호남지방의 고을 수령을 하던중  홀연히 경태병자(1456년, 단종복위거사 사육신 사건)의 일이 생각나서 곧 벼슬을 버리고 함양에 은거하여 후학을 가르치다가 중종23년(1528년) 무자 9월 29일에 향년 71세로 세상을 떠났다.
부인은 성주 이씨 지번의 따님이다.
아들은 세언 대년이요 사위는 하활이다.
세언과 아들 가선대부 휘 조령 ,(조령의)아들 증 공조참판 휘 융등 
3세의 선조 묘는 고창공의 묘 왼쪽 산능선 해좌(사향: 동남향)에 있고
융의 아들 휘 인남의 묘는 대병곡 임좌(병향: 남향)에 있다.
이후는 능히 다 기록하지 못한다.
 숭정4주 기사(1809년) 봄 추모하여 건립하고
9대손 상순이 글을 쓰다.
              

 선조(先祖)님에 대한 약술(略述)


7세
면성부원군(綿城府院君)  諱 문오(文晤)

벼슬: 
은청광록대부 (銀靑光祿大夫),상주국(上柱國), 동평장사 [同平章事] 
면성부원군(綿城府院君)

은청광록대부 [ 銀靑光祿大夫 ] 
고려시대 문관의 위계제도.

국초에는 이 명칭이었으나, 995년(성종 14)부터 은청흥록대부(銀靑興祿大夫)로 바뀌고, 
1076년(문종 30)에 본래 명칭으로 되면서 정3품으로 전체 29계 가운데 제4계가 되었다.

그 뒤 1275년(충렬왕 1)에 또다시 개칭되었는데, 『고려사(高麗史)』 백관지 문산계조에는 중봉대부(中奉大夫)로 바뀌었다고 기술하고 있는 데 반하여 
『익재난고(益齋亂藁)』 권9 상 충선왕 세가에서는 봉익대부(奉翊大夫)로 개명하였다고 설명이 되어 있어 혼란을 빚고 있다.

그러나 이후 중봉대부는 보이지 않고 대신에 봉익대부가 중요한 관계의 하나로 기능하고 있으므로 아마 후자가 옳지 않나 생각된다. 
그런데 봉익대부는 1310년(충선왕 2)의 개정 때에 종2품 상계(上階)로서 재상반열(宰相班列)의 관계가 되고 있다.

상주국 [ 上柱國 ] 
고려시대의 정2품 훈직(勳職).

흔히 벼슬은 관(官 : 官職과 官階)ㆍ작(爵)ㆍ훈(勳)으로 구별된다. 
이 가운데 훈은 국가에 공이 있는 사람에게 주는 명예직으로, 
상주국은 바로 이 훈에 해당된다.

고려시대의 훈직은 상주국과 주국(柱國)의 두 가지가 있었다. 
문종 때 상주국은 정2품으로 주국은 종2품으로 하였는데, 충렬왕 이후는 폐지되었다. 
고려는 상주국ㆍ주국 등의 훈직을 일반 신하에게는 거의 수여하지 않았다.

『고려사(高麗史)』를 통하여 확인되는 사례는 예종 때 최홍사(崔弘嗣)ㆍ이오(李0xF849), 충렬왕 때 김방경(金方慶) 등 극히 소수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왕족의 경우는 봉작(封爵)을 수여하면서 반드시 훈직인 상주국을 수여해주고 있어 대조가 된다고 하겠다.

평장사 [平章事] 
고려시대의 정2품 관직. 
  
 ≪고려사≫ 백관지에 의하면, 
문종 때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문하평장사·중서평장사가 있었으며, 정원은 각 1인이었다.

그러나 실제 문하평장사·중서평장사는 두어져 있지 않았고, 
대신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가 설치되어 있었다. 
또한, 정원도 1인으로 고정되지 않고, 대체로 중서시랑·문하시랑이 복수인 경우가 많았다.

평장사의 서열은 문하시랑이 중서시랑보다 위이고, 평장사보다 동중서문하평장사가 상위가 되었다. 
따라서, 평장사 중에서는 중서시랑평장사가 초직이고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가 최상위직이었다. 
이와 같이, 평장사 사이에는 명칭상으로 중서·문하의 구별이 있었으나, 그 반차(班次)는 상하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고려에서는 중서성과 문하성이 구분되지 않고 중서문하성으로서 운영되었다. 
더욱이 양성의 평장사를 겸하는 동중서문하평장사를 가하는 일이 많았으므로, 평장사는 중서성과 문하성의 구별을 초월해 같은 중서문하성의 재신(宰臣)으로서 함께 국사를 논의하였다.

고려 후기에는 1274년(충렬왕 1)에 찬성사로 개칭되었다가 1356년(공민왕 5)에 다시 평장사로 환원되었다. 
1362년에 또다시 찬성사로 되었다가 1369년에 평장사로 고쳐져 여말에 이르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1392년(태조 1) 관제 신정(新定) 때에 문하부(門下府)의 종1품 관직인 찬성사로 개편되면서 소멸하였다. 
이 찬성사가 뒤에 의정부의 좌우찬성 및 좌우참찬으로 이어졌다.


 부원군 [府院君]
조선시대 왕의 장인이나 친공신(親功臣)에게 주던 작호(爵號).

고려 충렬왕 이후부터 나타나는데, 이 당시에도 왕의 장인이나 공신에게 내려준 듯하다.

조선시대에는 외척의 세력을 누르기 위해 1417년(태종 17) 2월 외척봉군과 1444년(세종 26) 7월 부마봉군을 없애면서, 종실과 공신만을 봉군했다. 
그뒤 1470년(성종 1) 4월 친공신을 부원군에 봉하면서 왕의 장인도 함께 부원군에 봉해진 듯하다. 〈
경국대전〉에서 친공신과 왕의 장인을 정1품으로, '부원'을 더해 '부원군'으로 부르도록 법제화했다. 
받는 사람의 본관을 앞에 붙여 불렀고, 같은 부원군이 생겼을 경우에는 옛 지명이나 다른 글자를 넣어 불렀다. 
초기에는 직접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했으나, 중기 이후 정치에 참여하면서 많은 문제점이 생겼다.

윤유(允瑜) --- 한산파
윤인(允璘)
윤광(允珖) --- 장단파
윤구(允球) --- 지평파
윤유(允鏐) 





8세
諱  윤유(允鏐) 

벼슬: 군부정랑(軍簿正郞: 정5품)

정랑 [正郞]
1275년(충렬왕 1) 상서6부(尙書六部) 및 그의 속아문인 고공사(考功司)와 도관(都官)에 속한 정5품 관직인 낭중(郎中)을 정랑으로 개칭했다. 
문종 때 낭중은 부마다 2명이 있었는데 이부에만 1명이었다. 그리고 고공사와 도관에는 각각 2명을 두었다. 
정랑으로 바꾼 뒤에도 정원은 같았다. 
1298년에 낭중으로 환원되었다가 얼마 뒤에 다시 정랑이 되었고, 
1308년에는 직랑(直郞)으로 잠시 개칭되기도 했다. 
이후에도 6부의 명칭이 바뀔 때마다 낭중·직랑으로 이름이 바뀌다가, 
1389년(공양왕 1) 6조 체제의 확립과 함께 정랑으로 고정되어 조선시대로 이어졌다.



9세
諱  천무(天茂)

벼슬: 소윤 (少尹 : 종4품) ,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 : 정3품)

소윤 [ 少尹 ] 
고려시대 각 시(寺)의 관직.
문종 때에는 시 또는 그 전신이 되는 관서에 종4품직의 소경(少卿)이 있었는데, 대체로 충선왕 때에 소윤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윤(尹)의 다음 벼슬로 전중시ㆍ위위시ㆍ예빈시ㆍ대부시ㆍ소부시ㆍ사재시 등에 소속되어 있었다.

판종부시사 [判宗簿寺事]
 고려 시대, 종부시(宗簿寺)의 으뜸 벼슬. 정삼품(正三品)이다. 
*宗簿寺(종부시) - 종부사로 읽지 않는다.



10세
풍정공(楓亭公)  諱 의룡(義龍)

1388년(우왕 14) 의주목사(義州牧使)가 되셨고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워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었고 단서철권(丹書鐵券) 을 받으셨다.

벼슬: 
호조판서(戶曹判書: 정2품)‧ 병조판서(兵曹判書: 정2품)‧ 형조판서(刑曹判書: 정2품).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정1품)

판서 [ 判書 ] 
조선시대 육조(六曹: 吏·戶·禮·兵·刑·工)의 으뜸 벼슬로 정이품(正二品)이고, 정원은 각 1원이다. 
1405년(태종 5)에 설치하여 1894년(고종 31)에 폐지(廢止)되었다.

조선시대 육조(六曹)의 장관을 판서라 하였다. 
개국 초에는 전서(典書: 正三品)로서 지위가 낮아 정치에 깊이 참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1405년(태종 5)에 판서로 고치고 
품계도 정이품으로 올려 의정부에서 관장하고 있던 실권도 물려받았다.

육조의 판서는 의정부의 참찬(參贊: 正二品), 한성부의 판윤(判尹: 正二品), 홍문관(弘文館)의 대제학(大提學: 正二品)과 더불어 정경(正卿)이라 일컬었으며,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대신(大臣)이라 개칭될 때까지 중추적 관직의 하나로 존속하여 왔다.

영중추부사 [ 領中樞府事 ] 
조선시대 중추부(中樞府)의 으뜸 벼슬인 영사(領事)로 정일품(正一品)이며 정원은 1원이다. 
대신(大臣) 외에는 오르지 못했다.
아래로 판사(判事: 從一品) 2원, 지사(知事: 正二品) 6원, 동지사(同知事: 從二品) 8원, 첨지사(僉知事: 正三品) 8원, 경력(經歷: 從四品) 1원, 도사(都事: 從五品) 3원이 있다.




11세
諱 강(綱)

벼슬  
가선대부(嘉善大夫:종2품) 
行 형조참판(刑曹參判:종2품) 兼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종2품) 

가선대부 [ 嘉善大夫 ] 
조선시대 종이품(從二品)의 문관과 무관에게 주던 품계이다. 
종이품의 하계(下階)로서 가정대부(嘉靖大夫)·가의대부(嘉義大夫)보다 아래 자리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이후로 문무관에게만 주다가, 대전회통(大典會通)에서는 종친(宗親)과 의빈(儀賓: 임금의 사위)에게도 주었다.
 처(妻)에게는 정부인(貞夫人)의 작호(爵號)가 주어졌다.

형조참판 [ 刑曹參判 ] 
조선시대 형조(刑曹)에 둔 종이품(從二品)으로 정원은 1원이다. 
위로 형조판서(刑曹判書: 正二品)가 있고, 아래로 형조참의(刑曹參議: 正三品 堂上) 1원, 형조정랑(刑曹正郞: 正五品), 형조좌랑(刑曹佐郞: 正六品) 각 3원이 있다. 

판서를 정경(正卿)이라고 하고, 참판은 아경(亞卿)이라고 한다.
원래 사평부(司平府)에 두었던 좌사(左使)·우사(右使)를 
1404년(태종 4) 3월 참판사평부사(參判司平府使)라고 개칭했다가, 
1405년(태종 5) 1월 사평부가 호조(戶曹)에 병합되고 육조의 의랑(議郞) 각 2원을 좌·우참의(左右參議)로 바꾸었다. 
1432년(세종 14)에 참판·참의 각각 1원으로 개편되어 각 조(曹)의 판서를 보좌하는 차관으로, 예하 주요기관의 제조(提調)를 겸하였다. 
1894년(고종 31)의 갑오개혁 이후에는 협판(協辦: 勅任官)이라 하였다.

동지의금부사 [ 同知義禁府事 ] 
조선시대 의금부(義禁府)에 둔 종이품(從二品) 관직인 동지사(同知事)로 정원은 2원이다.
위로 판사(判事: 從一品) 1원, 지사(知事: 正二品) 1원이 있고, 아래로 경력(經歷: 從四品), 참상도사(參上都事: 從六品) 5원, 참외도사(參外都事: 從八品) 5원이 있다. 
후기에 경력은 폐지하였다. 지사를 도와주는 보좌역으로 다른 직책과 겸직할 수 있었다.
1414년(태종 14)에 의용순금사(義勇巡禁司)가 의금부로 개편되었으나 이때는 동지의금부사가 없었고
 1466년(세조 12) 의금부의 직제를 판사, 지사 다음의 직책으로 동지의금부사를 설치한다고 경국대전에 전해진다.



12세
諱 형(亨)

벼슬 단양군사(丹陽郡事: 종4품) 
     贈 호조참판(戶曹參判: 종2품)

군수 [郡守]
중국 진(秦)에서 제후들을 멸하고 군을 설치한 다음 수(守)를 둔 것이 기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6세기에 신라가 군(郡)을 설치하고 태수(太守)를 둔 것이 처음이었다. 

군현제가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은 고려 때부터이다. 
1018년(현종 9) 전국에 4도호부(都護府) 8목(牧) 56지주군사(知州郡事) 28진장(鎭長) 20현령(縣令)을 설치했다. 
그러나 이때는 명칭을 지군사(知郡事)라고 했으며, 품계는 5품이었다. 

조선 건국 후 1466년(세조 12) 군현제를 개편하면서 군수로 개칭했다. 
1431년(세종 13) 〈주관육익 周官六翼〉의 제도에 의거해 외관의 품질을 다시 정했는데, 이때 지군사를 종4품으로 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임기는 1,800일로 임명자가 당상관인 경우와 부임지가 변방 등으로 가족을 데리고 갈 수 없는 지역일 경우는 900일로 했다. 
녹봉은 호조에서 지급했다. 
군수의 품계는 현령·현감보다 높지만 행정상으로는 수평관계이고 각자 감사의 통제를 받았다.

호조참판 [ 戶曹參判 ] 
조선시대 호조(戶曹)에 둔 종이품(從二品) 관직으로 정원은 1원이다. 
위로 호조판서(戶曹判書: 正二品)가 있고, 아래로 호조참의(戶曹參議: 正三品 堂上) 1원, 호조정랑(戶曹正郞: 正五品), 호조좌랑(戶曹佐郞: 正六品) 각 3원이 있다. 
판서를 정경(正卿)이라고 하고, 참판은 아경(亞卿)이라고 한다.

원래 사평부(司平府)에 두었던 좌사(左使)·우사(右使)를 
1404년(태종 4) 3월 참판사평부사(參判司平府使)라고 개칭했다가, 
1405년 1월 사평부가 호조(戶曹)에 병합되고 육조의 의랑(議郞) 각 2원을 좌·우참의(左右參議)로 바꾸었다. 
1432년(세종 14)에 참판·참의 각각 1원으로 개편되어 각 조(曹)의 판서를 보좌하는 차관으로, 예하 주요기관의 제조(提調)를 겸하였다. 
1894년(고종 31)의 갑오개혁 이후에는 협판(協辦: 勅任官)이라 하였다.





13세 
평강공(平康公)  諱 이(頤)
 함양파, 개부파, 노성파, 무안파, 군수공파, 경파의  직계(直系) 중조(中祖)이시며 평강공 께서 영덕현감 부임시 데려가셨던 조카는 영덕에 정착하여 영해파의 입향조가 되신 휘(諱) 지몽(之蒙)으로 영해파와도 특별한 관련이 있는 분이다.

벼슬:  영덕현감, 평강 현감(縣監: 종6품)
      贈 가선대부 병조참판(嘉善 大夫 兵曹 參判 : 종2품)


가선대부 [ 嘉善大夫 ] 
조선시대 종이품(從二品)의 문관과 무관에게 주던 품계이다. 
종이품의 하계(下階)로서 가정대부(嘉靖大夫)·가의대부(嘉義大夫)보다 아래 자리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이후로 문무관에게만 주다가, 대전회통(大典會通)에서는 종친(宗親)과 의빈(儀賓: 임금의 사위)에게도 주었다.

해당 관직으로는 종친부(宗親府)의 군(君)·종정경(宗正卿), 충훈부(忠勳府)의 군(君), 의빈부(儀賓府)의 위(尉), 돈령부(敦寧府)·중추부(中樞府)·의금부(義禁府)·경연청(經筵廳)·성균관(成均館)·춘추관(春秋館)의 동지사(同知事), 육조(六曹)의 참판(參判), 한성부(漢城府)의 좌윤(左尹)·우윤(右尹), 사헌부(司憲府)의 대사헌(大司憲), 규장각(奎章閣)·홍문관(弘文館)·예문관(藝文館)의 제학(提學), 규장각의 직제학(直提學), 교서관(校書館)의 부제조(副提調),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의 부총관(副摠官),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좌부빈객(左副賓客)·우부빈객(右副賓客), 세손시강원(世孫侍講院)의 좌유선(左諭善)·우유선(右諭善), 개성부(開城府)·강화부(江華府)의 유수(留守), 교서관(校書館)·제언사(堤堰司)·비변사(備邊司)·선혜청(宣惠廳)·준천사(濬川司)·승문원(承文院)·봉상시(奉常寺)·종부시(宗簿寺)·사옹원(司饔院)·내의원(內醫院)·상의원(尙衣院)·사복시(司僕寺)·군기시(軍器寺)·사섬시(司贍寺)·군자감(軍資監)·장악원(掌樂院)·관상감(觀象監)·전의감(典醫監)·사역원(司譯院)·선공감(繕工監)·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사도시(司寺)·사재감(司宰監)·전함사(典艦司)·전연사(典涓司)·소격서(昭格署)·종묘서(宗廟署)·사직서(社稷署)·경모궁(景慕宮)·제용감(濟用監)·평시서(平市署)·전생서(典牲署)·내자시(內資寺)·내섬시(內贍寺)·예빈시(禮賓寺)·전설사(典設司)·장흥고(長興庫)·빙고(氷庫)·장원서(掌苑署)·사포서(司圃署)·사축서(司畜署)·조지서(造紙署)·혜민서(惠民署)·도화서(圖畵署)·활인서(活人署)·와서(瓦署)·귀후서(歸厚署)·문소전(文昭殿)·연은전(延恩殿)·영희전(永禧殿)·화령전(華寧殿)·장생전(長生殿)·경리청(經理廳)의 제조(提調), 오위(五衛)·겸사복(兼司僕)·내금위(內禁衛)·우림위(羽林衛)·용호영(龍虎營)의 장(將), 훈련도감(訓鍊都監)·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의 대장(大將), 훈련도감(訓鍊都監)·금위영·어영청·총융청(摠戎廳)의 중군(中軍), 총융청·관리영(管理營)·진무영(鎭撫營)의 사(使), 포도청(捕盜廳)의 좌대장(左大將)·우대장(右大將), 팔도(八道)의 관찰사(觀察使)·절도사(節度使)·방어사(防禦使)·통어사(統禦使), 경기도(京畿道)·경상도(慶尙道)·전라도(全羅道)·함경도(咸鏡道)·평안도(平安道)의 부윤(府尹), 경상도의 수군중군(水軍中軍) 등이 있었다.
돈령부·중추부동지사를 제외한 동지사, 부총관, 제학, 직제학, 제조, 부제조, 좌우부빈객, 총리영·진무영의 사, 절도사, 방어사는 모두 예겸(例兼)하였다. 
처(妻)에게는 정부인(貞夫人)의 작호(爵號)가 주어졌다.

병조참판 [ 兵曹參判 ] 
조선시대 병조(兵曹)에 둔 종이품(從二品) 관직으로 정원은 1원이다. 
위로 병조판서(兵曹判書: 正二品)가 있고, 아래로 병조참의(兵曹參議: 正三品 堂上), 병조참지(兵曹參知: 正三品), 병조정랑(兵曹正郞: 正五品), 병조좌랑(兵曹佐郞: 正六品) 등이 있다. 
판서를 정경(正卿)이라고 하고, 참판은 아경(亞卿)이라고 한다.

원래 사평부(司平府)에 두었던 좌사(左使)·우사(右使)를 1404년(태종 4) 3월 참판사평부사(參判司平府使)라고 개칭했다가, 1405년 1월 사평부가 호조(戶曹)에 병합될 때 육조의 의랑(議郞) 각 2원을 좌·우참의(左右參議)로 바꾸었다. 1432년(세종 14)에 참판·참의 각각 1원으로 개편되어 각 조(曹)의 판서를 보좌하는 차관으로, 예하 주요기관의 제조(提調)를 겸하였다. 
1894년(고종 31)의 갑오개혁 이후에는 협판(協辦: 勅任官)이라 하였다.


子 
관경(觀卿), 
임경(臨卿--함양파, 개부파, 노성파), 
익경(益卿--무안파), 
항경(恒卿--군수공파), 
진경(晋卿--경파). 

묘(墓)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팔야리 



14세
숙천공(肅川公)  휘(諱) 임경(臨卿)
평강공의 2子. 

첫째 부인인 연안김씨와 사별 후 성삼문의 따님인 창령 성씨를 부인으로 맞으셨으며 단종복위 거사실패로 처형된 장인 성삼문등 사육신들의 시신을 몰래 수습하여 노량진(현재 사육신묘)에 매장 하셨다. 당시 역적의 시신을 수습하여 매장하는 것도 엄벌에 처했기 때문에 이러한 행위는 목숨을 건 대단히 용기 있는 결단 이었다.


 벼슬: 숙천부사(肅川府使: 종3품) 황주목사(黃州牧使: 정3품)
       贈 자헌대부 이조판서(資憲大夫 吏曹判書: 정2품)

부사 [ 府使 ] 
조선시대 지방(地方) 관직(官職)의 하나이다. 정원은 1원이다.
고려시대에 개성부(開城府)와 지사부(知事府)의 수령을 부사라고 했으며, 
조선시대에는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 正三品)와 도호부사(都護府使: 從三品)를 일컫는 말이다. 
경주(慶州)와 같이 정이품(正二品) 관직을 두던 부(府)의 수령(守令)은 부사(府使)라 하지 않고 부윤(府尹)이라고 하였다.

도호부사의 줄임말이기도 하지만 도호부는 부와는 다른 행정구역 이므로 엄밀하게 말하자면 지사부의 장관이다. 
특히 조선시대의 도호부사는 부사로 약칭되기도 했는데 이것도 역시 도호부의 사(使)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부사는 고려에만 존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1406년(태종 6) 지방관제를 정비할 때 안동·강릉·안변·영변 등에 대도호부사를 파견하였다. 
또한 1415년(태종 15)에는 종래의 군(郡)으로서 1,000호 이상인 고을을 일괄적으로 도호부로 승격시켜 도호부사를 파견하였다.

대도호부사는 정3품으로 목사보다 상위직이었으며, 도호부사는 종3품으로 목사와 군수의 중간에 해당하였다. 
대도호부사는 초기의 4개직에서 선조 때 장원의 승격으로 5개직으로 증가하였고, 
도호부사는 초기에 44개직이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약 75개직으로 확산되었다.

도호부사 중 동래부사만은 정3품 당상관으로 임명하였다.

목사 [ 牧使 ] 
조선시대 관찰사(觀察使) 밑에서 각 목(牧)을 다스리던 정삼품(正三品) 동반 외관직(外官職)이다. 
목은 큰 도(道)와 중요한 곳에 두었는데, 왕실과 관계가 있는 지방은 작더라도 목으로 승격시켰다.

경기도(京畿道)에 3원[여주(驪州)·파주(坡州)·양주(楊州)], 
충청도(忠淸道)에 4원[충주(忠州)·청주(淸州)·공주(公州)·홍주(洪州)], 
경상도(慶尙道)에 3원[상주(尙州)·진주(晉州)·성주(星州)], 
전라도(全羅道)에 4원[나주(羅州)·광주(光州)·제주(濟州)·능주(綾州)], 
강원도(江原道)에 1원[원주(原州)], 
황해도(黃海道)에 2원[황주(黃州)·해주(海州)], 
함경도(咸鏡道)에 1원[길주(吉州)], 
평안도(平安道)에 2원[안주(安州)·정주(定州)] 
등 모두 20원을 두었다.

주요업무는 관할지역에 대한 농업의 장려, 호구(戶口)의 확보, 공부(貢賦)의 징수, 교육의 진흥, 군정의 수비, 사송(詞訟)의 처결 등이며, 
조선 전기 진관체제(鎭管體制)가 시행될 때는 각 진관의 책임자인 첨절제사(僉節制使)의 군직을 겸하였다. 
관찰사 예하의 수령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위치였다고 할 수 있다.

자헌대부 [ 資憲大夫 ] 
조선시대 정이품(正二品) 동서반(東西班) 문무관(文武官)에게 주던 품계(品階)이다. 
정이품의 하계(下階)로서 정헌대부(正憲大夫)보다 아래 자리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이후로 문무관에게만 주다가, 대전회통(大典會通)에서는 종친(宗親: 임금의 4대손까지의 친족)과 의빈(儀賓: 임금의 사위)에게도 이 품계를 주었다.

정2품관은 1438년 정비된 녹과(祿科)에 의거하여 실직(實職)에 따라 1년에 네 차례에 걸쳐 모두 중미(中米) 12석, 조미(糙米) 40석, 전미(田米) 2석, 황두(黃豆) 18석, 소맥 9석, 
주(紬) 5필, 정포(正布) 14필, 저화 8장을 녹봉으로 지급받았다. 

해당 관직으로는 종친부(宗親府)의 군(君)·지종정경(知宗正卿), 의정부(議政府)의 좌참찬(左參贊)·우참찬(右參贊), 충훈부(忠勳府)의 군(君), 의빈부(儀賓府)의 위(尉), 돈령부(敦寧府)·중추부(中樞府)·의금부(義禁府)·경연청(經筵廳)·성균관(成均館)·춘추관(春秋館)·훈련원(訓練院)의 지사(知事), 홍문관(弘文館)·예문관(藝文館)의 대제학(大提學), 규장각(奎章閣)의 제학(提學), 육조(六曹)의 판서(判書), 한성부(漢城府)의 판윤(判尹),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좌빈객(左賓客)·우빈객(右賓客), 수원부(水原府)·광주부(廣州府)의 유수(留守),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의 도총관(都摠官), 제언사(堤堰司)·비변사(備邊司)·선혜청(宣惠廳)·준천사(濬川司)·교서관(校書館)·승문원(承文院)·봉상시(奉常寺)·종부시(宗簿寺)·사옹원(司饔院)·내의원(內醫院)·상의원(尙衣院)·사복시(司僕寺)·군기시(軍器寺)·사섬시(司贍寺)·군자감(軍資監)·장악원(掌樂院)·관상감(觀象監)·전의감(典醫監)·사역원(司譯院)·훈련원(訓練院)·선공감(繕工監)·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사도시(司寺)·사재감(司宰監)·전함사(典艦司)·전연사(典涓司)·소격서(昭格署)·종묘서(宗廟署)·사직서(社稷署)·경모궁(景慕宮)·제용감(濟用監)·평시서(平市署)·전생서(典牲署)·내자시(內資寺)·내섬시(內贍寺)·예빈시(禮賓寺)·전설사(典設司)·장흥고(長興庫)·빙고(氷庫)·장원서(掌苑署)·사포서(司圃署)·사축서(司畜署)·조지서(造紙署)·혜민서(惠民署)·도화서(圖畵署)·활인서(活人署)·와서(瓦署)·귀후서(歸厚署)·문소전(文昭殿)·연은전(延恩殿)·영희전(永禧殿)·화령전(華寧殿)·장생전(長生殿)·훈련도감(訓鍊都監)·양향청(糧餉廳)·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의 제조(提調), 용호영(龍虎營)의 별장(別將), 총리영(總理營)·수어청(守禦廳)의 사(使) 등이 있었다.
돈령부·중추부지사를 제외한 지사, 양관대제학, 도총관, 좌우빈객, 제학, 제조, 총리영·수어청사는 모두 예겸(例兼)하였다. 
처(妻)에게는 정부인(貞夫人)의 작호(爵號)가 주어졌다.

이조판서 [ 吏曹判書 ] 
조선시대 육판서(六判書) 중의 하나이고, 이조(吏曹)의 으뜸 벼슬로 정이품(正二品) 관직으로, 정원은 1원이다. 
아래로 이조참판(吏曹參判: 從二品), 이조참의(吏曹參議: 正三品 堂上) 각 1원과 이조정랑(吏曹正郞: 正五品), 이조좌랑(吏曹佐郞: 正六品) 각 2원이 있다.
1392년(태조 1)에 정삼품의 전서(典書) 2원을 두었으나, 1403년(태종 3)에 1명을 감하고 1405년(태종 5)에 판서로 고쳐 정이품으로 올렸다. 
이후 이조판서는 육조의 수석장관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조판서는 다른 육조의 판서와 함께 1894년의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이조(吏曹)는 고려와 조선의 행정기관이다. 
육조 가운데 우두머리에 해당하는 부서로 문관의 임용, 공훈 및 봉작, 인사 고과 등을 담당한다. 

이조판서는 천관(天官: 吏曹)의 정경(正卿)으로서 이조를 총괄하고 이조에 소속된 문선사(文選司)·고훈사(考勳司)·고공사(考功司) 등의 속사(屬司)와 충익부(忠翊府)·종부시(宗簿寺)·상서원(尙瑞院)·내시부(內侍府)·사옹원(司饔院)·내수사(內需司) 등 속아문(屬衙門)의 제조(提調)가 되어 이를 지휘하였다. 또 비변사(備邊司) 등에도 제조로 참여하였다.


연안 김씨 소생
평(坪) -- 함양파, 개부파
 
창령 성씨 소생 --- 노성파
증(增)
호(壕) 
한(垾) 

 이분 아드님으로 부터  함양, 개부, 노성파가 비롯 되었다.

묘(墓)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팔야리 





15세
諱 평(坪)

숙천공의 장자(長子).
 함양파, 개부파의 파조(派祖)가 되시는 분으로 고창현감을 지내시다 벼슬을 버리시고 장인인 이지번(李之蕃)을 따라 처가인 함양에 정착한 뒤로 그곳에서 은거하여 강학(講學)하시며 다시는 벼슬길에 나서지 않으셨다.

벼슬: 고창현감(高敞縣監: 종6품).

현감 [ 縣監 ] 
조선시대 동반(東班) 종육품(從六品) 외관직(外官職)으로 정원은 138원인데 후기에는 122원으로 줄었다. 
부윤(府尹: 從二品)·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 正三品)·목사(牧使: 正三品)·도호부사(都護府使: 從三品)·군수(郡守: 從四品)·현령(縣令: 從五品)과 같이 
각도 관찰사(觀察使: 從二品)의 관할(管轄) 하에 있었다.

1413년(태종 13) 지방제도 개혁 때 감무(監務)를 현감(縣監: 從六品)으로 개칭했다. 
이로써 현의 수령으로 현령과 현감을 두게 되었다. 
당시 지방의 말단기관장인 역(驛)의 찰방(察訪: 從六品)과 동격인, 지방수령 으로서는 가장 낮은 관직이었다. 
경국대전에 법제화 되어 대한제국까지 이어졌다. 군직 으로는 절제도위(節制都尉)를 겸하였다.

현감(縣監)을 두었던 현을 각 도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경기도(京畿道)에는 
통진(通津: 도호부사로 승격)·죽산(竹山: 도호부사로 승격)·시흥(始興: 현령으로 승격)·지평(砥平)·과천(果川)·음죽(陰竹)·양성(陽城)·양지(陽智)·교동(喬桐: 도호부사로 승격)·교하(交河: 군수로 승격)·가평(加平: 군수로 승격)·포천(抱川)·적성(積城)·연천(漣川)이 있었다.

충청도(忠淸道)에는 
보은(報恩: 군수로 승격)·제천(堤川)·직산(稷山)·회인(懷仁)·연풍(延豊)·음성(陰城)·청안(淸安)·진천(鎭川)·목천(木川)·영춘(永春)·영동(永同)·황간(黃澗)·청산(靑山)·대흥(大興: 군수로 승격)·덕산(德山: 군수로 승격)·홍산(鴻山)·평택(平澤)·정산(定山)·청양(靑陽)·은진(恩津)·회덕(懷德)·진잠(鎭岑)·연산(連山)·노성(魯城)·부여(扶餘)·석성(石城)·비인(庇人)·남포(藍浦)·결성(結城)·보령(保寧)·해미(海美)·당진(唐津)·신창(新昌)·예산(禮山)·전의(全義)·연기(燕岐)·아산(牙山)이 있었다.

경상도(慶尙道)에는 
인동(仁同: 도호부사로 승격)·하양(河陽)·용궁(龍宮)·봉화(奉化)·청하(淸河)·언양(彦陽)·진보(眞寶)·현풍(玄風)·군위(軍威)·비안(比安)·의흥(義興)·신령(新寧)·예안(禮安)·연일(延日)·장기(長鬐)·영산(靈山)·창령(昌寧)·기장(機長)·자인(慈仁: 인조 15년에 신설)·영양(영양: 肅宗 2년에 신설)·거창(居昌: 도호부사로 승격)·하동(河東: 도호부사로 승격)·개령(開寧)·삼가(三嘉)·의령(宜寧)·칠원(漆原)·진해(鎭海)·문경(聞慶)·함창(咸昌)·지례(知禮)·안의(安義: 安陰)·고령(高靈)·산청(山淸: 山陰)·단성(丹城)·사천(泗川)·웅천(熊川)이 있었다.

전라도(全羅道)에는 
무주(茂朱: 도호부사로 승격)·광양(光陽)·옥과(玉果)·남평(南平)·구례(求禮)·곡성(谷城)·운봉(雲峰)·임실(任實)·장수(長水)·진안(鎭安)·동복(同福)·화순(和順)·흥양(興陽)·장성(長城: 선조 33년에 珍原縣을 編入하고 도호부사로 승격)·대정(大靜: 군수로 승격)·정의(旌義: 군수로 승격)·용안(龍安)·함열(咸悅)·부안(扶安)·함평(咸平)·강진(康津)·고산(高山)·태인(泰仁)·옥구(沃溝)·흥덕(興德)·정읍(井邑)·고창(高敞)·무장(茂長)·무안(務安)·해남(海南)이 있었다.

황해도(黃海道)에는 
토산(兎山)·장연(長淵)·장련(長連)·송화(松禾)·강령(康翎)·은율(殷栗)이 있었다.

강원도(江原道)에는 
이천(伊川: 도호부사로 승격)·평강(平康)·금화(金化)·낭천(狼川)·홍천(洪川)·양구(楊口)·인제(麟蹄)·횡성(橫城)·안협(安峽)이 있었다.

함경도(咸鏡道)에는 
홍원(洪原)·이원(利原: 利城)·길주(吉州: 吉城縣, 牧使로 승격). 명천(明川: 도호부사로 승격)이 있었다.

평안도(平安道)에는 
양덕(陽德)·맹산(孟山)·태천(泰川)·강동(江東)·은산(殷山)이 있었다.

대춘(大春)
세언(世彦) -- 함양파
대년(大年) -- 개부파

墓 : 경남 함양 (西加巖亥坐)





16세
諱 대년(大年)
15세 諱 坪의 3子로 개부파의 파조 이시다.

벼슬: 익위(翊衛: 정5품)

익위 [翊衛 ]
조선시대 세자의 시위(侍衛)를 맡아본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정5품 관직. 
정원은 2인이다. 좌·우 각 1인씩을 두었다. 
1418년(태종 18)에 좌·우사어(左右司禦)를 고친 이름이다. 
이들은 왕세자를 위하여 경서를 강하고 또한 질문에 응답하는 데 참가 하였던 만큼 그 선발이 엄격하였다.

강연 외에 담제의례(禫祭儀禮), 왕세자와 사부(師傅)·빈객(賓客)의 상견례, 서연진강(書筵進講) 의례 등에 왕세자를 보위하여 참석하였다. 
정조 이후 좌우를 없애고 익위로만 불렀다.

墓 : 경남 함양 서면 병곡 (德岩子坐)



17세
諱 억중(億中)
16세 諱 大年의 獨子

벼슬: 참봉(參奉: 종9품)

참봉 [參奉] 
조선 시대 동•서반 종9품직(從九品職). 
세조 12년(1466) 1월 관제 경정(官制更定) 때에 9품관(九品官)은 모두 참봉(參奉)이라 일컫게 하였음.

종친부(宗親府), 돈령부(敦寧府), 봉상시(奉常寺), 사옹원(司饔院), 내의원(內醫院), 군기시(軍器寺), 군자감(軍資監), 관상감(觀象監), 전의감(典醫監), 사역원(司譯院), 선공감(繕工監), 사재감(司宰監), 전연사(典涓司), 소격서(昭格署), 사직서(社稷署), 제용감(濟用監), 전생서(典牲署), 오부(五部), 예빈시(禮賓寺), 혜민서(惠民署), 전옥서(典獄署), 활인서(活人署), 문소전(文昭殿), 연은전(延恩殿), 경기전(慶基殿), 영희전(永禧殿), 만녕전(萬寧殿), 안릉(安陵), 지릉(智陵), 숙릉(淑陵), 의릉(義陵), 순릉(純陵), 정릉(定陵), 화릉(和陵), 건원릉(健元陵), 제릉(齊陵), 정릉(貞陵), 후릉(厚陵), 헌릉(獻陵), 영릉(英陵), 현릉(顯陵), 장릉(莊陵), 사릉(思陵), 광릉(光陵), 경릉(敬陵), 창릉(昌陵), 공릉(恭陵), 선릉(宣陵), 순릉(順陵), 정릉(靖陵), 온릉(溫陵), 희릉(禧陵), 태릉(泰陵), 효릉(孝陵), 강릉(康陵), 목릉(穆陵), 장릉(章陵), 장릉(長陵), 휘릉(徽陵), 영릉(寧陵), 숭릉(崇陵), 명릉(明陵), 익릉(翼陵), 의릉(懿陵), 혜릉(惠陵), 원릉(元陵), 홍릉(弘陵), 영릉(永陵), 건릉(健陵), 인릉(仁陵), 수릉(綏陵), 경릉(景陵), 예릉(睿陵), 현륭원(顯隆園), 휘경원(徽慶園), 숭의전(崇義殿: 麗陵), 태일전(太一殿), 숭덕전(崇德殿), 숭인전(崇仁殿), 숭령전(崇靈殿) 등에 두었다.

전(殿)·묘(廟)·릉(陵)에는 1원씩, 숭의전에 2원, 숭덕전에 1원, 숭인전에 2원, 숭령전에 2원을 두었으며, 돈령부·봉상시·내의원·군기시에 각 1원씩, 예빈시·관상감·전의감·사역원·전옥서에 각 2원씩 두었다. 이 밖에 선공감, 사재감, 전연사, 소격서, 사직서, 제용감, 전생서, 오부, 태일전 등에는 중기 이후에 폐지하였다.

墓 : 경남 함양 서면 병곡 (德岩子坐)




18세
諱 덕사(德思)
17세 諱 億中의 獨子



19세
諱 인(仁)
18세  諱 德思의 獨子

 개부파의 세거지인 개성에 이주하신 개성정착의 비조(鼻祖)이시다.
 임진왜란중 행적기록이 유실되어 출생연도를 비롯하여 이분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없다.

墓 :개성 양릉리 용수산 남쪽 취라동 




20세
諱 정(禎) (1595~1655)
19세  諱 仁의 獨子

贈 통훈대부 장악원정 (通訓大夫 掌樂院正 : 정3품 당하관)

통훈대부 [ 通訓大夫 ] 
조선시대 정삼품(正三品) 동반(東班) 문관(文官)에게 주던 품계(品階)이다. 
정삼품의 하계(下階)로서 통정대부(通政大夫)보다 아래 자리로 당하관(堂下官)의 최상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이후로 문관에게만 주다가, 대전회통(大典會通)에서는 종친(宗親: 임금의 4대손까지의 친족)과 의빈(儀賓: 임금의 사위)에게도 이 품계를 주었다.

문산계에서는 정3품 상계인 통정대부 이상을 당상관(堂上官)이라 하고, 하계인 통훈대부 이하를 당하관(堂下官)이라 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직후인 1392년(태조 1) 7월 문산계가 제정될 때 정3품 상계는 통정대부, 하계는 통훈대부로 정하여져 『경국대전』에 그대로 법제화되었다.
당하관(堂下官)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였기 때문에 더 올라갈 자리가 없다는 뜻으로 계궁(階窮)이라고 하였다. 
기술관이나 서얼 출신의 관리는 이 이상 진급할 수 없었다

1438년(세종 20)에 정비된 녹과(祿科)에 의거하여 실직(實職)에 따라 1년에 네 차례에 걸쳐 당하관은 중미(中米 : 중질의 쌀) 10석, 조미(糙米 : 벼를 매갈아서 만든 쌀) 30석, 전미(田米 : 좁쌀) 2석, 황두(黃豆 : 누런 콩) 15석, 소맥(小麥 : 참밀) 7석, 주(紬) 4필, 정포(正布) 13필, 저화 8장을 지급받았다.

아울러 직전도 당하관에게는 60결이 지급되었다. 
그러나 1556년(명종 11) 직전법도 완전히 폐지되고, 이러한 정3품에 지급되던 녹봉은『속대전』에서 당하관에게는 미 1석2두를 지급하도록 규정하였다. 

해당 관직으로는 종친부(宗親府)·돈령부(敦寧府)·봉상시(奉常寺)·종부시(宗簿寺)·사옹원(司饔院)·내의원(內醫院)·상의원(尙衣院)·사복시(司僕寺)·군기시(軍器寺)·사섬시(司贍寺)·군자감(軍資監)·장악원(掌樂院)·관상감(觀象監)·전의감(典醫監)·사역원(司譯院)·선공감(繕工監)·사도시(司寺)·사재감(司宰監)·제용감(濟用監)·내자시(內資寺)·사섬시(司贍寺)·예빈시(禮賓寺)의 정(正), 의빈부(儀賓府)의 부위(副尉)·첨위(僉尉), 규장각(奎章閣)의 직각(直閣), 교서관(校書館)의 대교(待敎), 홍문관(弘文館)·예문관(藝文館)의 직제학(直提學),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보덕(報德)·겸보덕(兼輔德), 세손강서원(世孫講書院)의 좌유선(左諭善)·우유선(右諭善), 성균관(成均館)의 좨주(祭酒), 춘추관(春秋館)의 편수관(編修官), 승문원(承文院)의 판교(判校), 통례원(通禮院)의 좌통례(左通禮)·우통례(右通禮), 사옹원의 제거(提擧), 팔도(八道)의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목사(牧使) 등이 있었다.
직각, 대교, 직제학, 편수관은 모두 예겸(例兼)하였다. 
처(妻)에게는 숙인(淑人)의 작호(爵號)가 주어졌다.


장악원정 [ 掌樂院正 ] 
조선시대 장악원(掌樂院)의 정삼품(正三品) 당하관이며, 정원은 1원이다. 
악공색(樂工色)과 악생색(樂生色)을 관장하였다.
위로 제조(提調: 從二品∼從一品)가 2원이 있고, 아래로 첨정(僉正: 從四品) 1원, 주부(主簿: 從六品) 2원, 직장(直長: 從七品)이 있다. 후에 직장은 폐지하였다.

墓: 개성 청교면 비전문 동쪽



21세
諱 승건(承建)(1641~1716)
20세 諱 정(禎)의 4子

贈 통정대부 형조참의 (通政大夫 刑曹參議: 정3품 당상관)

통정대부 [ 通政大夫 ] 
조선시대 정삼품(正三品) 동반(東班) 문관(文官)에게 주던 품계(品階)이다. 
정삼품의 상계(上階)로서 통훈대부(通訓大夫)보다 상위 자리로 당상관(堂上官)의 말미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이후로 문관에게만 주다가, 대전회통(大典會通)에서는 종친(宗親: 임금의 4대손까지의 친족)과 의빈(儀賓: 임금의 사위)에게도 이 품계를 주었다.

통정대부는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는 데 참여하였으며 근무일수에 상관없이 능력에 따라 가자(加資) 또는 가계(加階)되었다. 
관직에서 물러난 다음에도 봉조하(奉朝賀)가 되어 녹봉(祿俸)을 받는 등의 특권을 누렸다.

정3품 당상관에게는 1438년(세종 20)에 정비된 녹과(祿科)에 의거하여 실직(實職)에 따라 1년에 네 차례에 걸쳐 중미(中米 : 중질의 쌀) 11석, 조미((糙米 : 매갈아서 만든 쌀) 32석, 전미(田米 : 좁쌀) 2석, 황두(黃豆 : 누런 콩) 15석, 소맥(小麥 : 참밀) 7석, 주(紬) 4필, 정포(正布) 13필, 저화 8장을 지급하였다.

아울러 정3품 당상관에게는 65결의 직전이 지급되었다. 
그러나 1556년(명종 11) 직전법도 완전히 폐지되고, 이러한 정3품에 지급되던 녹봉은『속대전』에서는 당상관에게는 매달 미 1석9두, 황두 1석5두를 지급하도록 규정하였다.

해당 관직으로는 종친부(宗親府)·돈령부(敦寧府)의 도정(都正), 의빈부(儀賓府)의 부위(副尉)·첨위(僉尉), 종친부·상서원(尙瑞院)의 정(正), 비변사(備邊司)·교서관(校書館)·승문원(承文院)·사옹원(司饔院)·내의원(內醫院)·상의원(尙衣院)·전옥서(典獄署)의 부제조(副提調), 육조(六曹)의 참의(參議), 병조(兵曹)의 참지(參知), 규장각(奎章閣)의 직제학(直提學), 승정원(承政院)의 도승지(都承旨)·좌승지(左承旨)·우승지(右承旨)·좌부승지(左副承旨)·우부승지(右副承旨)·동부승지(同副承旨), 장예원(掌隷院)의 판결사(判決事), 사간원(司諫院)의 대사간(大司諫), 경연청(經筵廳)의 참찬관(參贊官), 홍문관(弘文館)의 부제학(副提學),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찬선(贊善), 세손강서원(世孫講書院)의 좌유선(左諭善)·우유선(右諭善), 성균관(成均館)의 대사성(大司成), 춘추관(春秋館)의 수찬관(修撰官), 등이 있었다.
부제조, 직제학, 참찬관, 수찬관, 상서원정은 모두 예겸(例兼)하였다. 
처(妻)에게는 숙부인(淑夫人)의 작호(爵號)가 주어졌다.

형조참의 [ 刑曹參議 ] 
조선시대 형조(刑曹)에 둔 정삼품(正三品) 당상관(堂上官)으로 정원은 1원이다. 
위로 형조판서(刑曹判書: 正二品), 형조참판(刑曹參判: 從二品)이 있고, 아래로 형조정랑(刑曹正郞: 正五品), 형조좌랑(刑曹佐郞: 正六品) 각 3원이 있다.
처음에는 각 조(曹)에 각 1인씩, 총 6원을 두었다. 
1405년(태종 5) 관제 개편 때 종래에 두었던 육조의 참랑(參郞) 각 2원을 폐지하고 좌·우참의(左右參議)를 각 1원씩 총 12으로 증원하였다그러나 1434(세종 16) 무신들을 배려하여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4원을 증치하는 대신 좌·우참의를 참의로 바꾸고, 1원으로 감원하였다각 조의 참판과 함께 판서를 보좌하면서도 판서와 대등한 발언권을 지니고 있었다.

 

개성 청교면 비전문 동쪽

 

 

22

신민(信敏)(1673~1737)

21세 諱 승건(承建)의 2

 

贈 가선대부 공조참판 嘉善大夫 工曹參判 2)

 

가선대부 嘉善大夫 ] - 13세 평강공 내용 참고

조선시대 종이품(從二品)의 문관과 무관에게 주던 품계이다

종이품의 하계(下階)로서 가정대부(嘉靖大夫가의대부(嘉義大夫)보다 아래 자리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이후로 문무관에게만 주다가대전회통(大典會通)에서는 종친(宗親)과 의빈(儀賓임금의 사위)에게도 주었다.

()에게는 정부인(貞夫人)의 작호(爵號)가 주어졌다.

 

공조참판 工曹參判 ]

조선시대 공조(工曹)에 둔 종이품(從二品관직으로 정원은 1원이다

위로 공조판서(工曹判書正二品) 1원이 있고아래로 공조참의(工曹參議正三品 堂上) 1공조정랑(工曹正郞正五品), 공조좌랑(工曹佐郞正六品각 3원이 있다

판서를 정경(正卿)이라고 하고참판은 아경(亞卿)이라고 한다.

 

원래 사평부(司平府)에 두었던 좌사(左使우사(右使)를 1404(태종 4) 3월 참판사평부사(參判司平府使)라고 개칭했다가

1405년 1월 사평부가 호조(戶曹)에 병합되고 육조의 의랑(議郞각 2원을 좌·우참의(左右參議)로 바꾸었다

1432(세종 14)에 참판·참의 각각 1원으로 개편되어 각 조()의 판서를 보좌하는 차관으로예하 주요기관의 제조(提調)를 겸하였다

1894(고종 31)의 갑오개혁 이후에는 협판(協辦勅任官)이라 하였다.

墓 개성 용수산 남쪽 취라동

 

 

 

23

부사공(府事公諱 상욱(尙郁)(1699~1769)

22세 諱 신민(信敏)의 獨子

 

개부파의 중흥조(中興祖이시다.

이분은 모든 개부파 의 선조가 되시며 이분의 다섯 아드님(文德文行文道,文謙文彩,)으로부터 개부파가 번성하게 되었다.

 

벼슬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2)

 

가선대부 嘉善大夫 ] - 13세 평강공 내용 참고

 

동지중추부사 同知中樞府事 ]

중추부동지사 (中樞府同知事)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중추부의 종2품 관직.

조선시대 중추부(中樞府)에 두었던 종이품(從二品관직인 동지사(同知事)로 정원은 8원이다.

위로 영사(領事正一品) 1판사(判事從一品) 2지사(知事正二品) 6원이 있고,

 아래로 첨지사(僉知事正三品) 8경력(經歷從四品) 1도사(都事從五品) 3원이 있다.

 

중추부는 조선시대 일정한 직무가 없는 당상관(堂上官)들을 우대하기 위해 설치된 관청이다.

본래 나라의 군사관계즉 출납·병기·군정·경비·차섭(差攝등의 일을 맡은 관청이던 중추원(中樞院)을 1466(세조 12)에 중추부로 고치고그 직무는 병조에 넘겼다.

맡은 일거리가 없는 벼슬아치들을 우대하기 위한 관청으로만 보존해 오다가 고종(高宗때 다시 중추원으로 고쳐 의정부에 소속시켰다.

 

墓 개성 용수산 남쪽 취라동

 

 

 24

諱 文德(1726~1777)

23세 부사공(府事公) 상욱(尙郁)長子

 

贈 通訓大夫 掌樂院正

 

: 개성 서면 봉락동

 

 

24

諱 文行

(1729~1814)

23세 부사공(府事公) 상욱(尙郁)次子

 

贈 左承旨

 

 

 

: 개성 청교면 총릉동

 

24

諱 文道

(1735~1790)

23세 부사공(府事公) 상욱(尙郁)3

 

贈 左承旨

 

 

 

: 개성 풍덕 진봉산

 

 

25

諱 天禧

(1746~1806)

24諱 文德長子

贈 左承旨

 

 

 

: 개성 서면 봉락동

 

 

25

諱 徵禧

(1762~1824)

24諱 文德次子

순조실록 16, 순조 1269일 경술 1번째기사

송영(松營)의 기사 백총(騎士百摠) 박징희(朴徵禧)송영군(松營軍)의 도령(都領)으로 부진(赴陣)하였다.상으로 가자한다.

 

순조실록 15, 순조 12421일 계해 9번째기사 1812년 청 가경(嘉慶) 17

송영(松營)의 백총(百摠) 박징희(朴徵禧집사 최정복(崔貞福) 등의 기병(騎兵) 119명은 서쪽·동쪽·남쪽 세 길에 군사를 매복시켰다.

 

순조실록 15, 순조 12121일 을미 4번째기사 1812년 청 가경(嘉慶) 17

 

기사 백총(騎士百摠) 박징희(朴徵禧)는 서쪽을 공격했고,

 

 

25

참판공(參判公諱 순희(順禧)

24세 승지공(承旨公諱 문도(文道)의 長子.

 

개부파 문중의 보첩(譜帖자료를 수집정리 하시어 계보의 기초를 완성하신 분이다.

 

소년시절에 한성시(漢城試)에 급제(一中)하셨으나 벼슬에는 전혀 뜻이없이

학문을 연마하여 인근은 물론 지방에까지 널리 알려져 많은 유생들이 래유 하였으나 32세에 早卒 하시니 유림에서 심히 애통해 하셨다고 한다.

 

贈 가선대부(嘉善大夫 2)호조참판(戶曹參判 2)

 

가선대부 嘉善大夫 ] 13세 평강공 내용 참고

 

호조참판 戶曹參判 ]

조선시대 호조(戶曹)에 둔 종이품(從二品관직으로 정원은 1원이다.

위로 호조판서(戶曹判書正二品)가 있고아래로 호조참의(戶曹參議正三品 堂上) 1호조정랑(戶曹正郞正五品), 호조좌랑(戶曹佐郞正六品각 3원이 있다.

판서를 정경(正卿)이라고 하고참판은 아경(亞卿)이라고 한다.

 

원래 사평부(司平府)에 두었던 좌사(左使우사(右使)를 1404(태종 4) 3월 참판사평부사(參判司平府使)라고 개칭했다가

1405년 1월 사평부가 호조(戶曹)에 병합되고 육조의 의랑(議郞각 2원을 좌·우참의(左右參議)로 바꾸었다

1432(세종 14)에 참판·참의 각각 1원으로 개편되어 각 조()의 판서를 보좌하는 차관으로예하 주요기관의 제조(提調)를 겸하였다.

1894(고종 31)의 갑오개혁 이후에는 협판(協辦勅任官)이라 하였다.

 

墓 개성 풍덕 진봉산 동쪽 양원동

 

25

휘 성희(聖禧)

24세 승지공(承旨公諱 문도(文道)의 二子.

 

19세 諱 仁 (개성 입향조이하 개부파 선조님들의 묘비상석 건립등 위선사업(爲先事業)에 공이 크신분이다.

 

무과에 급제하셨으나 벼슬에는 뜻이 없으시어 독서와 서예를 즐기셨다.

개부파에는 무과급제자가 총 7분이신데 그중 효시(嚆矢)이시다.

 

墓 개성 풍덕 진봉산 동쪽 양원동

 

 

 

25

諱 지희(志禧 )

24세 諱 문행(文行)의 2

 

임술보(壬戌修譜: 1802)에 진력하셨다.

 

墓 개성 풍덕 진봉산 동쪽 양원동

 

 

 

25

諱 임희(任禧)

24세 승지공(承旨公諱 문도(文道)의 3.

 

개부파는 24세부터 효도로서 어버이를 섬기는 어른이 많으셨으며 그중에서도 께서는 효성의 지극함이 자자하여 나라에서 정려문(旌閭門)을 내려 개부파 문중을 빛나게 하셨고 이것이 귀감이되어 그 후로 우리 문중에 효자,효녀,열부,열녀등이 연달아 배출하게 되어 우리문중에 훌륭한 전통을 세우신 분이다.

 

墓 개성 南聽陵瓮 治洞 丁坐

 

 

 

26

동중추공(同中樞公諱 진수(震秀)

25세 참판공(參判公諱 순희(順禧)의 유복자(遺腹子)

 

개부파로서는 2번째 무과 급제자 이시며 당시 유명했던 명필 남이형(南履炯)에게 비문을 부탁하여 早卒 하신 참판공의 묘비건립을 하는등 효행이 자자하셨던 분이다.

 

벼슬동중추겸 가선대부 (嘉善大夫2),오위장(同中樞兼 五衛將)

 

가선대부 嘉善大夫 13세 평강공 내용 참고

 

오위장 五衛將 ]

조선시대 오위(五衛)의 으뜸 벼슬로 종이품(從二品)이었다가 정조(正祖때 정삼품(正三品)으로 격하되었으며정원은 12원에서 15원으로 늘렸다

3원을 증원하되 2인을 문관으로 충당하여 위장소의 사무를 맡아보게 하였는데 이를 조사오위장(曹司五衛將)이라고 하였다.

아래로 상호군(上護軍正三品), 대호군(大護軍從三品), 호군(護軍正四品), 부호군(副護軍從四品), 사직(司直正五品), 부사직(副司直從五品), 

사과(司果正六品), 부장(部將從六品), 부사과(副司果從六品), 사정(司正正七品), 부사정(副司正從七品), 사맹(司猛正八品), 부사맹(副司猛從八品), 

사용(司勇正九品), 부사용(副司勇從九品)이 있었다.

직소(職所)를 오위장청(五衛將廳또는 위장청(衛將廳)이라 하였다.

임진왜란 후에 실권을 훈련도감(訓鍊都監등의 새 군영(軍營)에 빼앗기고도성(都城)의 숙위(宿衛)만을 맡아보면서 명목만 남아 있다가 1882(고종 19)에 폐지되었다.

 

오위가 평상시에는 주로 입직(入直)과 행순(行巡도성 내외를 순찰하는 일및 시위(侍衛등의 임무를 수행하였기 때문에 

오위장들은 외소(外所남소(南所서소(西所동소(東所북소(北所등 다섯 위장소(衛將所)에 번을 갈아 각각 1명씩 입직하여 왕의 지명에 따라 임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순행에 있어서는 오위장이 군사 10명을 인솔하고 시간을 나누어 순찰한 뒤 이상 유무를 직접 왕에게 보고하였다.

나라에 경사가 있어 국왕에게 축하를 드리는 조하(朝賀)가 있을 때에는 위장이 그 군사를 이끌고 궁정에 정렬시위하였다.

 

墓 개성 삼빈동 동쪽 산기슭 (三彬峴 東麓 丑坐)

 

 

26

현감공(縣監公諱 동헌(東憲)

25세 諱 양희(養禧 의 2

 

벼슬정읍현감오위장(五衛將), 내금위장(內禁衛將2)

 

오위장 五衛將 ] - 위 26세 동중추공 참조

 

내금위장 [內禁衛將]

조선시대 종2품의 무관직.

왕의 호위와 대궐의 숙직을 맡아본 금군청(禁軍廳:龍虎營)의 내금위를 통솔하였으며정원은 3명이었다

영조 때 정3품으로 품계를 낮추었으며고종 때는 1명을 감해서 2명으로 하였다.

 

조선시대 내금위(內禁衛)에 둔 으뜸 벼슬로 서반 무관직이며금군장(禁軍將內禁衛將·兼司僕將·羽林衛將)의 하나이다

처음에 종이품(從二品)이었다가 1652(효종 3)에 내금위가 금군청(禁軍廳)에 합쳐지면서 정삼품(正三品당상관(堂上官)으로 내려졌다모두 타관이 겸했다.

1457(세조 3) 내금위절제사(內禁衛節制使) 6원을 두어 내금위장(內禁衛將)이라 하고 매번 2명씩 궁궐에서 직숙(直宿)하게 하였다

대우는 오위장(五衛將)과 같았다

1459(세조 5)에 3원으로 축소하고매번 1명씩 직숙하게 하였다.

1775(영조 31) 금군청이 용호영(龍虎營)으로 개칭되고정원도 처음에 3원이었다가

1790(정조 14)에 2원으로 줄었다내금위에는 내금위장 밑에 금군(禁軍) 200명이 있었다.

 

墓 개성 서월동 (西月洞 卯坐)

 

 승정원일기 >고종 >고종 4년 정묘 >720 >

병조가 아뢰기를,
선전관 이희관(李熙觀), 오위장 황현묵(黃顯默)ㆍ민유세(閔瑜世)ㆍ김근수(金謹秀)ㆍ박동헌(朴東憲), 충장위장 성정호(成定鎬), 문신겸선전관 윤영신(尹榮信)은 모두 신병이 갑자기 중해져서 직임을 수행할 가망이 없다 하며, 새로 제수된 경상좌도 수군우후 신석범(申錫範)어미의 나이가 현재 79세이므로 법으로 볼 때 멀리 떠나 부임할 수 없다는 이유로 정장하여 체직을 청하였습니다. 우후의 경우 부모 나이가 75세 이상인 자는 직책을 체차하도록 허락해준다는 내용이 법전에 실려 있으니, 이들을 모두 개차하소서. 갈파지 첨사( 波知僉使) 윤길대(尹吉大)는 신병이 갑자기 중해져서 기한 내에 길에 올라 부임할 가망이 전혀 없다며 정장하여 체직을 청하였습니다. 실제 병이 이와 같다 하더라도 변장의 임무는 규례대로 개차해서는 안 되니, 파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승정원일기 >고종 >고종 4년 정묘 >115 >

2차 정사를 하였다. 조현승(曺賢承)을 무신겸선전관으로 삼았다. 동지(同知)에 박동헌(朴東憲)을 단부하고, 첨지 세자리에 김요흠(金堯欽)ㆍ최희림(崔喜林)ㆍ서학순(徐鶴淳)을 단부하고, 부총관(副摠管)에 조영하(趙寧夏)를 단부하였다.

 

승정원일기 >고종 >고종 4년 정묘 >121 >

병조가 아뢰기를,
오위장(五衛將) 이병학(李秉鶴)ㆍ김규순(金葵淳)ㆍ박수량(朴秀良)ㆍ박동헌(朴東憲)ㆍ임병주(林秉周)가 모두 병으로 직임을 수행하기 어렵다고 정장(呈狀)하여 체직을 청하였으니, 모두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승정원일기 >고종 >고종 4년 정묘 >121 >

 

고종실록 8, 고종 8325일 을묘 2번째기사 1871년 조선 개국(開國) 480

중군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전장(戰場:병인양요(丙寅洋擾))에 나가 도와준 것은 사실 직책상의 일입니다. 그러나 사민으로서 의리를 내세우고 적개심을 품고 행동한 데 대해서는 포상하는 은전을 베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생(幼生) 민치오(閔致五강황(姜璜)과 출신(出身) 김종원(金鍾源한덕교(韓德敎)는 모두 초사(初仕)에 조용(調用)하고, 전 오위장(五衛將) 박동헌(朴東憲), 가선 대부(嘉善大夫) 김정근(金廷根), 절충 장군(折衝將軍) 강석룡(姜錫龍), 전 부장(部將) 허헌(許櫶)은 모두 가자(加資)하고, 한량(閑良) 장익수(張益壽) 2()은 모두 상가(賞加)하고, 서리(書吏) 박응한(朴膺漢) 5인은 모두 첩가(帖加)하며, 기타 전장에 나간 사람들과 군졸들은 모두 본부에서 시상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국역비변사등록 253  >  고종 83  >  

지금 개성유수 서형순(徐衡淳)이 보고한 것을 보니, ‘지난번 병인양요(丙寅洋擾) 때에 본부의 중군(中軍) 윤위(尹湋)가 군병을 거느리고 연변(沿邊) 지역을 방어하며 지키다가 강화도에 들어가 비바람을 무릅쓰고 한데서 지냈는데, 사민(士民)들 가운데 백의(白衣)로 나가 싸운 자도 있고, ()에 입각하여 응모한 자도 있고, 있는 힘과 정성을 다하여 군량을 잇댄 자도 있어 이들 모두의 성명(姓名)을 책으로 만들어 보고합니다.’ 하였습니다. 중군이 군병들을 거느리고 지원하러 나온 것은 참으로 직분상 당연히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민들이 의를 위해 나아가 싸웠으니, 이러한 자들에 대해서는 포상하는 은전을 내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학 민치오(閔致五강황(姜璜), 출신 김종원(金鍾源한덕교(韓德敎)는 모두 초사(初仕)에 조발해 쓰고, 전 오위장 박동헌(朴東憲), 가선대부 김정근(金廷根), 절충장군 강석룡(姜錫龍), 전 부장 허헌(許櫶)은 모두 가자하고, 한량 장익수(張益壽) 2인은 모두 상가하고, 서리(書吏) 박응한(朴膺漢) 5인은 모두 체가(帖加)하고, 그 나머지 보고한 각 사람과 군졸들은 모두 본부에서 시상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리하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고종 >고종 26년 기축 >130 >

조병익에게 전교하기를,
사천 현감 이범철(李範澈), 평해 군수 정해욱(鄭海旭), 전 현감 박동헌(朴東憲)ㆍ박창우(朴昌祐), 곽산 군수 신학균(申鶴均), 진해 현감 이응렬(李膺烈)을 모두 내금위장에 제수하라.”
하였다.

 

 

 

26

부사공(府使公諱 동보(東輔)

25세 諱 양희(養禧 의 3

 

벼슬오위장(五衛將), 여산도호부사(礪山都護府使 3)

      가선대부(嘉善大夫 2)

 

오위장 五衛將 ] - 위 26세 동중추공 참조

 

가선대부 嘉善大夫 ] 13세 평강공 내용 참고

 

도호부사 都護府使 ]

조선시대 도호부(都護府)를 다스리는 으뜸 벼슬로 종삼품(從三品)관직이었다

1894(고종 31)에 폐지되었다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는 정삼품(正三品)이었다.

 

대전회통에서는 

전국의 도호부는 75개로 

경기도에 8충청도에 1경상도에 14전라도에 7황해도에 6강원도에 7함경도에 18평안도에 14곳이 있다

그리고 대도호부는 5개로 

경상도에 안동(安東창원(昌原), 강원도에 강릉(江陵), 함경도에 영흥(永興), 평안도에 영변(寧邊)이 있었다.

 

墓 개성 서면

 

 승정원일기 2759(탈초본 129) 고종 71224일 을유 37/39 기사 1870 同治(/穆宗) 9

以金健浩·李濂爲五衛將, 李敦夏爲文兼, 朴東輔爲守門將..

승정원일기 >고종 >고종 7년 경오 >1224 >

김건호(金健浩)ㆍ이렴(李濂)을 오위장으로, 이돈하(李敦夏)를 문신겸선전관(文臣兼宣傳官)으로, 박동보(朴東輔)를 수문장으로...

 

승정원일기 >고종 >고종 7년 경오 >1224 >

또 아뢰기를,
수문장 박동보(朴東輔)는 제수되었으나 지방에 있어 올라올 기약이 없다 하니,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승정원일기 2778(탈초본 130) 고종 9721일 계묘 36/43 기사 1872 同治(/穆宗) 11

朴東輔·全致運·朴瀅鎭爲五衛將

 

승정원일기 2778(탈초본 130) 고종 9721일 계묘 19/43 기사 1872 同治(/穆宗) 11

승정원일기 >고종 >고종 9년 임신 >721 >

又啓曰, 同知中樞府事金逸曾, 五衛將丁南柒·李麟根·李日福·朴東輔·朴瀅鎭, 部將洪穎普, 俱以病難供職, 呈狀乞遞, 竝改差, 何如? 傳曰,

 

또 아뢰기를,
동지중추부사 김일증(金逸曾), 오위장 정남칠(丁南七)ㆍ이인근(李麟根)ㆍ이일복(李日福)ㆍ박동보(朴東輔)ㆍ박형진(朴瀅鎭), 부장 홍영보(洪潁普)가 모두 병으로 직임을 수행하기 어렵다고 정장하여 체직을 청하였으니, 모두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27

군수공(郡守公諱 건형(健炯)

26세 諱 동보(東輔)의 長子 系 諱 동순(東淳)

 

효행이 지극하셨고 문학과 특히 서예에 출중하셔서 그 유묵(遺墨)도 보존되어 내려온다.

 

벼슬삭령군수(朔寧郡守4)

 

군수[郡守] --- 12세 諱 (참조

 

승정원일기 : 고종 29년 임진(1892) 814(기사) 맑음

윤용구(尹用求)를 우참찬으로, 이승순(李承純)을 공조 판서로, 민종묵(閔種默)을 예문관 제학으로, 오희준(吳煕俊)을 정평 부사로, 차기홍(車箕洪)을 영평 군수로, 박건형(朴健炯)을 삭녕 군수(朔寧郡守), 백성태(白聖泰)를 장단 부사(長湍府使), 이병우(李秉禹)를 곤양 군수(昆陽郡守)로 삼았다.

 

고종 22년 을유(1885) 816(임오) 맑음

선공감 가감역관 박장홍(朴長鴻)ㆍ박건형(朴健炯), 서부 도사 성대용(成大鏞)이 모두 신병을 이유로 정장하여 체차해 주기를 청하였습니다. 모두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고종 22년 을유(1885) 814(경진) 맑음

4차 정사를 하였다. 박장홍(朴長鴻)ㆍ박건형(朴健炯)을 가감역관으로 삼았다. 가감역관 임건주(林建周)ㆍ심의귀(沈宜龜)에게 지금 통정대부를 초자하였는데, 조관으로서 나이 80세가 되어 법전에 의거하여 가자한 것이다. 고 판서 심의면(沈宜冕)에게 좌찬성 대제학과 그에 따른 예겸을 추증하였는데, 판의금부사 심이택의 아비이다.

 

 

 

墓 개성 용수산 남쪽 취라동(吹纙洞 亥坐)

 

 

 

27

군수공 諱 원형(遠炯)

26세 諱 동보(東輔)의 3

 

철산군,강령군에 선정비(善政碑)가 서있을 정도로 치군사적(治郡事蹟)이 소상하여 송사순량전(松史循良傳)’에 올라 있다.

 

벼슬철산군수(鐵山郡守), 강령군수(康翎郡守4),

통정대부(通政大夫:3품 당상관)

 

통정대부 通政大夫 ] --- 21세 諱 승건(承建참조

 

平安南北道來去案 1900-06-17

鐵山郡守 朴遠炯의 제130報告書內 일본군함때문에 駕海宅島 沿邊 인민이 겁을 먹었기에 書記를 보내 曉喩하였으며 일본인들은 盤城號아래 묶어두고 草幕 3을 지었으며 연해 고봉에 紅白旗를 세웠으며 盤城號甑南浦에 갔다가 곧 돌아왔다고 한다는 報告書 6.

 

 

 

墓 개성 용수산 남쪽 취라동(吹纙洞 亥坐)

 

 

 

 

후기(後記)

개부파에는 증직(贈職)을 제수(除授)받으시거나 벼슬을 하신 분들이 이외에도 많이 계시지만 지면 관계상 다 올리지 못하였으며 비록 벼슬을 하지는 않으셨어도 문중에 의미 있는 분들은 소개를 하였습니다.

 

기록을 정리하다 보니 벼슬을 하지 않으시고 학문만 연마하시고 후학을 양성하신 어른문중의 화합과 선조님에 대한 숭조를 실천하신 어른지극한 효성으로 주위를 감복시킨 어른이름을 높이진 못했으나 자식을 위해 헌신하신 모든 어른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높은 벼슬을 하시고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기신 어른들을 당연히 존경하고 본받아야 하겠지만 그렇지 못한 어른들도 경시하거나 폄하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비록 벼슬을 못하시고 세상에 이름을 알리지 못하셨다 해도 모든 어른들이오늘날 우리를 있게 한 자랑스럽고 고마운 선조님들 입니다.

 

모든 선조님들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가지기 바랍니다.

 

開府派 31世 炯植

 

    

20세기 이전 기록 중 세계 유일한 ‘현대방식의 복식부기 실무회계기록’

박영진가 회계장부

박영진가 회계장부 현황은 歲丁亥八月日上吉辰 日記第一 외 총 14책으로 제책된 장부와 낱장 지편이 말려 있는 지편뭉치 장부 16권이다. 

지금까지 박영진가 회계자료 는 정확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그 일부가 복사물 형태로 국내 학계에 알려졌 으며 

필자는 2007년에 총 14책의 복사물을 접하게 되었다.

 

이 복사물은 2007년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마이크로필름실에서 촬영한바 있다.

복사물 자료는 한국회계 학회 부회장을 지낸 계명대 정기숙 명예교수와 함께 2007년부터 연구팀을 조직하여 14책 전량의 탈초를 진행하고 

그 결과를 2011년 『한국전통회계와 내부통제시스템』 Ⅰ·Ⅱ라는 제목으로 출판한 바 있고 

2012년 영국·독일·중국·일본 등 역사학자와 회 계사학자들이 모여 “Kaesŏng Double Entry Bookkeeping (KDEB) in a Global Perspective: Comparison with Europe, China and Japan Ⅰ”으로 그 세계사적 의의를 조명한 바 있다.

그동안 박영진가 회계자료의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문 화재 등록과 같이 공식적으로 접근하지 못한 이유는 

원본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진본 여부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본이 공개된 것은 『동아일보』 2013년 10 월 30일 제1면에서 “Kaesŏng Double Entry Bookkeeping (KDEB) in a Global Perspective: Comparison with Europe, China and Japan Ⅱ”의 학술대회를 보 도하면서 공개한 사진이 처음이다.

 

이 보도 이후 한국정부의 문화재 보호원칙에 따라 2013년 12월 문화재청의 문화재 등록을 위한 기초조사가 이루어진바 있고 

2013년 12월 18일 문화재청 공고 제2013-314호로 문화재보호법시행규칙 제34조 제4항에 따라 문화재 등록을 예고하고 

2014년 2월 26일자로 별첨 자료로 문화재 등록을 고시 한 바 있다.

 

조사 현장에서 펼쳐 본 자료는 제책된 14책과 유기적 연관을 갖는 기록 으로 회계학에서 정의 내리는 회계장부로서의 성격 즉 1매의 낱장 기록이라도 그것이 자산 및 자본의 변동에 관한 기록·계산된 상태인 이상 회계장부로 규정하고 있기 때 문에 박영진가 회계장부 현황은 ‘총 14책으로 제책된 장부와 낱장 지편이 말려 있는 지편뭉치 16권’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서지학계나 고문서학계에서 다루는 고서나 고문서의 통념과 달리 회계학에서 정의 내리는 ‘製冊’과 두루마리 형식으로 된 지편뭉치는 모두 ‘會計帳簿’이다.

회계학에서 장부란 매일매일 발생하는 모든 거래에 대해 질서정연한 원칙을 갖춘 기록으로 자 산·자본을 구성하는 각 요소와 항목이 공통의 계산단위인 화폐단위로 금액이 기록 되어 있고 해당 국가에서 지정한 도량형 표준의 수량대로 기록해서 재무제표 작성의 기초자료를 제공하는 기록을 지칭한다.

이러한 이유로 사회 통념상 낱장의 기록을 編 綴한 형식의 제책된 기록만을 冊이라 하지만 회계학에서는 製冊되지 않고 낱장으로 보관되어 있어도 회계장부이다.

따라서 박영진가 회계장부는 모두 14책과 16권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고할 수 있다.

 

기록을 회계기록으로 분류하기 위해서는 특히 복식부기 회계기록인가 아닌가로 분류하기 위해서는 먼저 기록의 주체가 영리추구 조직인가 비영리 조직인가, 정부기록인 가 민간 기록인가로 분류하고 복식부기 회계기록은 오늘날 기업 조직인 영리조직의 회계기록을 기준으로 삼고 있다.

복식부기 회계기록은 다시 기록의 목적에 따라 주요 부와 보조부로 그 종류를 구별한다.


회계기록의 목적은 외부 투자가 공시용 보고서인 결산보고의 목적을 추구하는 기록인가 아니면 내부관리를 목적으로 하는 기록인가 로 나눌 수 있다.

복식부기 회계기록의 분류 기준대로 박영진가 회계장부의 성격을 분류하면

박영진가 회계장부 14책과 16권은 복식부기 회계기록물로서 모두 영리를 추구하는 조직의 회계기록물이며 외부투자가 공시용 결산보고의 목적과 내부관리를 목적으로 하는 회계기록물이라고 그 성격을 규정할 수 있다.

미국 공인회계사회(AICPA)에서 1941년에 내린 회계에 대한 정의에서는 재무적 성 질을 지닌 거래와 사건을 기록 분류 요약하는 실무적 기술(Practical Art)이라는 점 을 강조하였으며 1970년 재정립된 정의에서는 경제적 의사결정 곧 기회비용을 인식 하는 경제적 선택에 유용한 재무적 성격의 양적 정보를 제공하는 현대적 성격을 강조 하고 있다.

박영진가 회계장부는 日記帳(分介帳)의 기록, 元帳(外上/他給長冊)의 분 류 장부로 主要簿를 구성하고 周會計冊(捧次帳(資産帳)·給次帳(負債帳), 會計斟酌 抄)의 요약하는 실무적 기술을 갖추어 미국 공인회계사회 1941년 회계에 대한 정의 와 1970년 정의에 모두 부합하는 장부 구조를 갖추고 있다.

특히 인삼 재배에 투입된 원가를 비밀에 부치지 않고 회계보고서로 작성한 《建陽 二年丁酉三月日上吉辰 各人會計冊》, 《大韓光武四年庚子九月日上吉辰 各人會計冊》의 보조장부가 주목된다.

이 보고서는 종삼 구입에서 최종 완제품 출시에 이르기까지 오 늘날 제조공정에 해당되는 제조활동에 소요된 비용을 차변에 기입하고 그 판매액을 대변에 기입하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결국 미국 공인회계사회에서 1970년대 와서야 공식적으로 천명한 경제적 의사결정 곧 기회비용을 인식하는 경제적 선택에 유용한 재무적 성격의 양적 정보를 제공하는 회계의 관리적 기능을 실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各人會計冊》인 것이다.

개성상인의 회계기술이 현재 전 세계에서 공유하는 복식부기 방식이라는 사실이 처음으로 알려진 계기는 玄丙周라는 출판인이 1916년 덕흥서림에서 출간한 출판물 『實用自修 四介松都治簿法』에 기인한다.

이 저서의 출간 이후 개성상인의 회계기술 에 대한 연구가 수없이 많이 진행되어 왔지만 결정적인 한계는 완벽한 복식부기임을 실증하는 상인들의 실무회계장부가 뒷받침되지 않았기 때문에 증거 자료가 미비하였다.

현재 전 세계에서 공인하는 세계 최초의 복식부기 회계를 제시한 증거물은 이탈 리아의 1494년 루카 파치올리(Luca Pacioli)의 저서이다(『Summa de Arithmetica, Geometria, Proportioni et Proportionalita(산술,기하, 비 및 비례총람』).

이 책의 복식부기 관련 부분에 대한 최초 영역본은 1914년 게이츠벡(John B. Geijsbeck)이 번역한 Ancient double-entry bookkeeping 이며 미국 회계사협회에서 1924년 An Original Translation of the Treatise on DOUBLE-ENTRY BOOKKEEPING , Translated for the Institute of Book-keepers Limited by Pietro Crivelli F.C .R . A 로 번역된 바 있다.

한국에서 玄丙周의 『實用自修 四介松都治簿法』 이 출간된 1916년은 루카 파치올리의 저서 영역본 출간년도인 1914년 보다 2년 뒤의 일이지만 일본 고베대학에서 히라이 야스타로가 루카 파치올리의 저서를 일본어로 출간한 1918년보다는 2년 먼저 출간되었다.

이 시기 출간된 영역본과 일본어본 출간 사이에 한국의 고유 복식부기 기술인 『實用自修 四介松都治簿法』이 출판된 것은 매 우 흥미로운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 고베대학의 회계사학자 히라이 야스타로는 1918 년부터 1925년까지 8년간 개성상인의 복식부기를 연구하고 1925년 독일에서 그 결 과를 발표한 바 있기 때문이다(Hirai Yasutaro und Alfred Isaac, Quellenbuch der ebwirtschaftslehre , Speath & Linde, Berlin, 1925).

 

이번 공개에서 1974년 大耕出版社에서 간행한 『務安朴氏開府波世譜』 全 족보도 함께 제시되어 박영진 가문이 언제부터 개성에서 정착하여 경제활동을 수행하여 왔 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족보에 의하면 이 가문은 務安朴氏이다.

務安朴氏 中始祖 朴進昇은 신라 제54대 경명왕의 여섯째 아들인 完山大君 朴彦華의 4代孫으로 고려 시대에 文科에 급제하여 國子祭酒를 지냈으며 공을 세워 務安을 食邑으로 하사받았다.

족보에 務安朴氏開府波의 朴氏上系系統圖를 보면 上始祖로 朴赫居世, 34세손이 며 고려의 대제학인 高麗國子祭酒 朴進昇을 中祖로 하는 후손이라 밝히고 있다.

현 재 무안박씨 시조 祠宇는 全羅道 務安郡 務安面 高節里 柄山에 소재하고 있다.

 

무안 박씨는 1600년경 개성에 정착하였으며 족보상 박영진 가문을 살펴보면

曾祖父 朴東輔(1830~1907)의 子 健炯(1853~1908)이 朴東淳(1804-1821)의 系子로 기재되어 있 다.

朴健炯의 長子가 朴在燾(1883~1942)이며 그의 長子가 恒鐘(1910~1965)이고 그 의 長子가 이번에 공개된 회계장부 소장자인 朴永璡(1935~)으로 기재되어 있다.

회계 장부 첫 번째 日記가 ‘歲丁亥八月(1887)’로 시작되므로 朴東輔(1830~1907)의 子 健 炯(1853~1908)과 그의 장자 朴在燾(1883~1942) 2대에 걸쳐 경영한 기업의 회계장 부로 사료된다.

『務安朴氏開府波世譜』에 등장하는 타성인물 사위, 며느리, 친우(墓碣銘撰) 중 주 목되는 인물이 세 사람이다.

먼저 滄江 金澤榮(1850~1927)이다.

『務安朴氏開府波世 譜』 서문에 健炯(1853~1908)의 墓碣銘의 문장을 韶護堂 金澤榮이 지은 것으로 소 개되어 있다.

滄江 金澤榮(1850~1927)의 당호는 韶濩堂으로 그의 많은 저서 『韓國 小史』, 『韓史綮』, 『校正三國史記』, 『滄江稿』, 『韶濩堂集』 중 박영진가 회계장부와 유 기적 연관을 갖는 부분이 『韶濩堂集』 8卷 <紅蔘誌>이다.

이 <紅蔘誌>는 개성상인이 삼포경영을 하게 된 유래와 현황을 정리 요약한 글이다.

앞서 언급한 바 있듯이 별첨 자료 사진에 보이는 《建陽二年丁酉三月日上吉辰 各人會計冊》, 《大韓光武四年庚子九 月日上吉辰 各人會計冊》은 박영진가에서 경영한 삼포 회계 결산서로서 구체적인 경영 자료가 회계처리 된 보조부이다.

金澤榮은 健炯보다 3년 먼저 태어났지만 20년을 더 오래 살면서 박영진가 기업경영을 소상히 관찰할 수 있었던 사료된다.

金澤榮의 『韶 護堂集』 8권 <紅蔘誌>의 내용과 박영진가 삼포경영은 상호 밀접한 연관이 존재하며 그 구체적인 연관성은 추후 연구를 통해 밝혀질 것을 기대한다.

두 번째로 족보상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은 孔聖學(1879~1957)이다.

『務安朴氏開 府波世譜』 3~87쪽에 朴東憲(1825~1895)의 장자 舜炯(1851~)의 사위로 기재되어 있다.

그는 金澤榮으로부터 한학을 배워 시문에 능통하였고 성균관부제학을 역임하 였다.

孫鳳祥 등과 인삼품종 개량, 경작방법 개선 등 삼포경영방법의 혁신을 주도한 것으로 1938년 開城商會를 창립하여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조기준, 『한국기업가사』, 박영사, 1983).

원본 조사 과정에서 새롭게 나타난 사실은 제책의 裝幀이 비단으로 추정되는 매우 고급 소재와 여성적 디자인으로 이루어진 것과 자본 소유주로 확인되는 鉢谷宅의 鉢谷이란 택호명이 박영진가 제위전 소재지 지명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회계학은 분류 학으로서 계정과목을 가지며 1. 자산 2. 부채 3. 자본 4. 수익 5. 비용 6. 잉여금조정 으로 계정과목을 분류한다.

이 중 3. 자본계정(Proprietorship a/c)은 기업주 본인이 투자한 자기자본의 증감을 처리하는 계정으로 원시투자자본 혹은 증자액을 대변으 로 감소를 차변으로 각기 분개하여 기입한다.

박영진가 회계장부 중 타급장책(자기자 본과 타인자본을 합체한 장부)의 첫 대변 투자의 주체가 바로 鉢谷宅이다.

지금까지 이 발곡택의 성격이 밝혀지지 않았는데 지편 뭉치 속에서 鉢谷은 박영진가 祭位 소재지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결국 박영진가 제사를 담당하는 발곡택은 박씨 가의 안방마님이자 동시에 자본 소유주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현대 회계에서 자본계정은 회사조직인 경우 경영활동의 결과로서 산출된 순이익 혹은 순손실을 자본금 계정에 직접 계상하는가 아니면 적립금이나 배당금으로 계상 하여 개인기업 조직과 다르게 처리한다.

박영진가의 회계장부 상의 발곡택 계정을 추 적하여 박영진가의 기업경영 조직이 개인회사인가 오늘날 주식회사 조직인가를 판단 할 수 있는 근거를 확보 할 수 있다고 사료된다.

요약하자면 총 14권으로 제책된 박영진가 개성 복식부기 장부는 이미 학계에 알려진 1786~1947년 북한 사회과학원 소장 회계장부, 1854~1918년 일본 고베대학 소장 회계장부와 달리 일기장에서 최종 손익계산서까지 경제 거래의 전 과정을 추적할 수 있는 완벽히 접합된 회계장부 세트이다.

현재 일본 고베대학에 소장된 1854~1918년 기간의 회계장부와 1962년 북한 학자 홍희유가 역사과학지에 소개한 1786년 현존하 는 최초의 개성복식부기 회계장부로 알려진 타급장책과 비교하여 볼 때 세 회계장부 는 모두 동일한 장부의 구조와 형식, 그리고 회계 관련 전문 용어를 구사한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박영진가 개성 복식부기장부(Kaesŏng Double Entry Bookkeeping: KDEB)는 기존 연구의 결과와 전혀 상반된 결론으로 이끈다.

개성상인 회계장부를 처음 수집하 고 연구한 사람은 일본인 히라이 야스타로(平井泰太郞) 고베대학 교수이다.

그가 일 기장과 타급장책, 외상장책 그리고 결산서와의 유기적 연관성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내린 연구 결론 즉 “개성상인의 회계기록은 현대적 의미의 복식부기 기록이 아니다” 라는 회의적인 결론과 상반된 연구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북한 자료도 2,027쪽에 달하는 거대한 분량이지만 한 집안에서 보존되어 온 자료가 아니라서 분개장과 총계 정원장 대차대조표와 손익계산서의 당기순이익 항목의 유기적 연관성을 추적 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이번 박영진가 개성 복식부기장부의 발견으로 현존하는 최 초의 회계장부와 장부 구조와 형식 그리고 분개 용어와 원장으로의 전기등 관련 전문 용어와 코드가 일치하여 ‘합리적 자본주의’의 실존을 증명하는 복식부기 실증 장부는 한국에서 18세기 후반부터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규명할 수 있게 되었다.

공개된 자료를 중심으로 정리하자면 박영진가 소장 회계장부는 일기장(분개장)에서 총 계정 원장 대차대조표 손익계산서 그리고 이익배분처리서까지 총 1,298쪽의 분량의 완벽한 세트로 1887년부터 1912년 모든 영업활동을 복식부기 방식으로 기입하여 추적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이다.

박영진가 자료의 발굴과 일부 기록의 현대 회계 방식으로의 전환의 성공으로 북한 사회과학원 소장 1786년부터 1947년까지 162년간 기록과 1854~1918년 65년간 고 베대학의 회계장부는 모두 현대 기업경영분석 방식 그대로 재무구조의 건전성과 안 정성 수익성 성장성 등을 분석할 수 있게 되었으며 분개에서 당기순이익 계산과 배분 까지 복식부기 방식으로 한 치의 오차 없이 기록한 완벽한 현대 방식의 복식부기 자 료라는 것이 실증된다.

미국과 유럽 등 세계에서 복식부기에 대한 연구 경향은 차변과 대변으로 분개하여 모든 거래를 두 번 기입하는 ‘중세방식 복식부기’ 연구에서 오늘날 기업에 대한 건강 진단서라 할 수 있는 경영분석 자료 즉 대차대조표와 손익계산서, 이익잉여금처분계 산서의 작성을 ‘현대 방식의 복식부기’로 정의 내리고 현대 방식의 방향으로 복식부기 를 연구하고 있다.

박영진가 회계장부의 내용상 가장 큰 특징은 ‘현대 방식의 복식부기’를 실증하고 동시대 유럽과 미국의 실증자료와 비교할 수 있는 회계원리의 보편적 특징을 구비하고 있다는 점이다.

영국은 1885년까지 기업제조원가회계를 체계적으로 인식하지 못한 상태이다(A.C. Littleton, Michael Chatfield 등 미국 유럽 회계사학 자들의 공통된 지적임).

독일은 ‘현대 방식의 복식부기’에 대한 사회과학적 인식만 확 산된다. 1924년 좀바르트(W. Sombart)의 근대자본주의론(Der Moderne Kapitalismus)과 베버(Max Weber), 슘페터(Schumpeter) 등에 의해 자본주의와 복식부기와의 연관성에 대해 사회과학적 의미 부여만 이루어지게 된다.

실무 차원에 서 1900년까지만 해도 영국과 미국의 공식적인 원가회계실무는 존재하지 않고 세계 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원가관리 회계는 아놀드(H.L Arnold)의 저서 The Complete Cost-Keeper 1899 (New York The Engineering Magazine Press, 1899) 매뉴얼만 나오게 된다.

이러한 실무자료의 부재에 대해 가너(Garner)가 1954 년 그의 저서 Evolution of Cost Accounting to 1925 (University of Alabama Press)에서 내린 결론은 “1885년 이전에도 원가 이론과 실무에 대한 관심은 다소 존 재하였으나 원가문제에 주의를 집중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전문가는 거의 없었다.

실무자료는 말할 것도 없다.

원가관리 회계는 아놀드(H.L Arnold)의 저서 The Complete Cost-Keeper 1899 가 세계에서 제일 앞선 저서이다.

그러나 이 저서는 원가회계를 작성한 기업 실무기록은 아니다”.

반면 박영진가는 1897년부터 1905년까 지 작성한 삼포도중회계책을 통하여 분개장, 총계장원장, 대차대조표, 손익계산서, 이 익잉여금처분배분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복식부기 방식으로 연결시켜 완벽한 대차 균형의 원리와 원가회계, 그리고 투자자와 경영인과의 이익배분계약관계까지 확인시 켜 주는 20세기 이전 기록 중 세계 유일한 ‘현대방식의 복식부기 실무회계기록’이라 는 세계 회계사적 의의를 갖추고 있다.

별첨 1_2014년 2월 26일 문화재청 문화재 등록 대상 세부 내역

문화재 등록 개요

□ 등록 대상

등록번호 문화재명 수량 및 규격 제작년대 소 재 지 비 고

587 개성 복식부기 장부 14책 지편(어음, 증서, 서간 등) 1식 1887~ 1912년 경기도 고양시

□ 세부 내역

번 호 장부명 기장기간 규 격 (세로×가로cm) 기장 면수 비 고

1 歲丁亥八月日上吉辰 日記第一 1887.8.15~ 1894.4.26 27.5×25.0 116 일기장(분개장)

2 歲甲午四月日上吉辰 日記第二 1894.4.28~ 1898.9.15 27.5×26.5 116 일기장(분개장)

3 光武二年戊戌九月日上吉辰 日記第三 1898.9.15~ 1901.4.9 28.5×27.3 116 일기장(분개장)

4 光武五年辛丑四月日上吉辰 日記第四 1901.4.10~ 1903.10.4 28.5×26.0 116 일기장(분개장)

5 光武七年癸卯十月日上吉辰 日記第五 1903.10.5~ 1905.2.24 28.0×25.3 116 일기장(분개장)

6 光武九年乙己二月日上吉辰 日記第六 1905.4.24~ 1906.11.16 28.2×25.0 116 일기장(분개장)

7 光武十年丙午十一月日上吉辰 日記第七 1906.11.16~ 1912.4.15 28.3×25.5 118 일기장(분개장)

8 光緖拾參年丁亥八 月日上吉辰 外上他 給幷付第一

光緖拾參年丁亥八月日 外上長冊第一上吉辰 1887.8.15 26.9×24.0 68 장책(원장)

光緖拾參年丁亥八月日 他給長冊第一上吉辰 1887.8.15 48

9 歲光緖十八年壬辰九月日上吉辰 周會計冊 1892~ 1893년 28.2×26.6 - 주회계(결산서)10 大韓光武二年戊戌八月日上吉辰 各處田畓文 記謄錄 1843~ 1910년 28.3×25.8 28 보조부

11 甲申九月日上吉辰 各人物出入記一 1884년 25.0×23.0 87 보조부

12 建陽二年丁酉三月日上吉辰 各人會計冊 1897년 27.5×26.0 116 보조부

13 大韓光武四年庚子九月日上吉辰 各人會計冊 1900년 28.7×25.2 116 보조부

14 歲癸己正月日上吉辰 外上抄二 1893년 27.3×26.0 21 보조부

별첨 2_

2014년 2월 26일 문화재청 문화재 등록 사진자료

개성 복식부기장부(Kaesŏng Double Entry Bookkeeping: KDEB) 14책

개성 복식부기장부 환, 어음, 삼포경영보고서 등 두루마리 지편 뭉치 14권

별첨 3_

2014년 2월 26일 문화재청 문화재 등록 조사시 새로 발굴된 製冊된 14冊 중

1887 自己資本 他人資本 資本 負債計定 元帳 他給長冊 첫 쪽

資本 所有主 鉢 谷宅과 지편뭉치 14捲에서 발견된 ‘鉢谷 祭位’ 紙片

309한국학 자료 탐구

박영진가 회계장부 14책 16권 연혁·유래·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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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호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사회과학부 교수

투고일자 2014년 2월 27일 심사일자 2014년 3월 12~24일 게재확정일자 2014년 3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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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haracteristics, Origins, and History of Pak Yǒng Jin’s Account Ledgers

Jun, Seong-ho

The current state of the account ledgers of Pak Yǒng Jin is comprised of fourteen bound volumes, including the ledger Ch ŏnggak Year, Eighth Month Volume I ( Se Ch ŏnggakP ’alw ŏlIlsangKiilIlgiCheil 歲丁亥八月日上吉辰日記第一), and sixteen rolls of single sheaves. A survey of the Pak Yǒng Jin accounting records had not been undertaken until now when the author heard in 2007 that a portion of the records were available in copy form when their existence was made public in Korean academic circles. The copies were photographed in the Changsǒgak Microfilm Room of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AKS). The records compiled by a research team organized by the author and former vice president of the Korean Accounting Association Jung Key Suk, Emeritus Professor at Keimyung University over all fourteen volumes and the results published as Korean Traditional Accounting and Internal Control Systems Vol. I, II. In 2012, history and accounting scholars from the United Kingdom, Germany, China, and Japan gathered to highlight the significance of the records in world history in the conference: “Kaesong Double Entry Bookkeeping (KDEB) in a Global Perspective: Comparison with Europe, China and Japan I.” Despite the great cultural value of the Pak Yǒng Jin accounting records, they were not officially registered as a cultural heritage because the originals had not been procured to verify their authenticity. The originals were first publicized in photographs on the first page of the Tonga Ilbo newspaper on Octoboer 30th 2013,1) while covering the “Kaesong Double Entry Bookkeeping (KDEB) in a

1) The Donga Ilbo OCTOBER 30, 2013 08:20 had front page news that new documents have been discovered that show how Kaesŏng merchants in the late 18th and 19th centuries used double-entry bookkeeping, often seen as the hallmark of capitalism. The report as foll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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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urteen volumes of accounting books from Kaesŏng merchants, which contain financial records in a complete modern double-entry bookkeeping format for a period of 25 years from the late 19th century in the Chosŏn Dynasty, have been discovered. The prevailing theory is that people worldwide started using double-entry bookkeeping only after the onset of the 20th Century, but materials demonstrating that Kaesŏng merchants had used modern double entry bookkeeping method that encompasses balance sheet, income statement, and allocation of interest prior to that time have thus been discovered. The 14 volumes of accounting books amounting to more than 1,000 pages, which are possessed by Park Yeongjin, a descendant of a Kaesŏng merchant, contain detailed accounting records that the Kaesŏng merchant’ s family recorded while engaging in ginseng farming and trade, cotton and cotton textile trade, and financial business from 1887 to 1912. They include documents ranging from books of original entry (accounting books that record in details debt and credit figures sourced from daily accounting, before registering in the ledger), general ledger, balance sheet, income statement, and allocation of profits to investors. The accounting books are recorded in a modern double-entry bookkeeping method, which allows viewers to accurately figure out movement of assets, and profits and losses. Double-entry bookkeeping has been used since the Middle Age worldwide. The Middle Age style double entry bookkeeping only recorded financial data on commercial activities and financial activities in the debt and credit columns. This bookkeeping method continued to develop, and eventually evolved to the modern double entry bookkeeping system, which now includes balance sheet, and income statement designed for public disclosure in corporate activities, and cost management accounting designed for internal reporting. “Nowhere in the world, practical accounting records of a company have been discovered in perfect form that recorded the entire accounting process through the modern double entry bookkeeping system before the 20th Century,” said Jeon Seong-ho, a professor at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who has been studying accounting books from the Park family. “The materials have demonstrated that Korea a used systematic, modern management accounting technique in a unique form that was not influenced by China and Japan nor by the West in the late 19th Century.” Fourteen volumes of accounting books from Kaesŏng merchants, which contain financial records in a complete modern double-entry bookkeeping format for a period of 25 years from the late 19th century in the Chosŏn Dynasty, have been discovered. The prevailing theory is that people worldwide started using double-entry bookkeeping only after the onset of the 20th Century, but materials demonstrating that Kaesŏng merchants had used modern double entry bookkeeping method that encompasses balance sheet, income statement, and allocation of interest prior to that time have thus been discovered. The 14 volumes of accounting books amounting to more than 1,000 pages, which are possessed by Park Yeong-jin, a descendant of a Kaesŏng merchant, contain detailed accounting records that the Kaesŏng merchant’s family recorded while engaging in ginseng farming and trade, cotton and cotton textile trade, and financial business from 1887 to 1912. They include documents ranging from books of original entry (accounting books that record in details debt and credit figures sourced from daily accounting, before registering in the ledger), general ledger, balance sheet, income statement, and allocation of profits to investors. The accounting books are recorded in a modern double-entry bookkeeping method, which allows viewers to accurately figure out movement of assets, and profits and losses. Double-entry bookkeeping has been used since the Middle Age worldwide. The Middle Age style double entry bookkeeping only recorded financial data on commercial activities and financial activities in the debt and credit columns. This bookkeeping method continued to develop, and eventually evolved to the modern double entry bookkeeping system, which now includes balance sheet, and income statement designed for public disclosure in corporate activities, and cost management accounting designed for internal reporting. “Nowhere in the world, practical accounting records of a company have been discovered in perfect form that recorded the entire accounting process through the modern double entry bookkeeping system before the 20th Century,” said Jeon Seong-ho, a professor at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who has been studying accounting books from the Park family. “The materials have demonstrated that Korea a used systematic, modern management accounting technique in a unique form that was not influenced by China and Japan nor by the West in the late 19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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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obal Perspective: Comparison with Europe, China and Japan I” Conference. Afterwards, a basic survey of the records was undertaken in December 2013 according to the Cultural Heritage Protection Act by the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and there was an advance notice that they would be registered as Cultural Heritage No. 2013-314 on December 18, 2013 according to Article 34, Clause 4 of the Cultural Heritage Act. On February 26, 2014, the records were registered as Cultural Heritages as separate documents. The nature of the fourteen volumes and their related records examined at the survey site are determined to be accounting ledgers due to the definition in accounting that if even a single sheet pertains to the calculating or recording of variations in assets and capital it is an accounting ledger; thus they can be summarized currently as ‘fourteen bound ledgers and sixteen rolls of single sheaves.’ In contrast to the commonly accepted notion in bibliography or archive science, ‘bound books’ (製冊) and rolls of sheaves as defined by accounting are all ‘accounting ledgers’ (會計帳簿). In accounting, a ledger is a record of all daily transactions written according to orderly principles with elements comprised of capital and assets with sums listed as items in units of currency and quantities in measurements standardized by the country and are a basic source of a written financial statement. For this reason, although a book is socially accepted as a record bound of single sheets, records stored as single sheets are regarded as ledgers in accounting. Therefore, all fourteen volumes and sixteen rolls comprising the Pak Yŏng Jin records can be seen as ledgers. In categorizing accounting records, in particular whether or not the records are double-entry bookkeeping records, first the subject of the records are categorized according to whether they are profit-seeking, nonprofit, or civilian organization records and double-entry bookkeeping records are categorized according to as present-day profit organization standards. Double-entry bookkeeping records are also distinguished by their primary and supplementary accounts according to the object of their records. The object of an accounting record can be divided into a public statement of accounts for outside investors or for internal administration. If we are to categorize the Pak Yŏng Jin reco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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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cording to double-entry bookkeeping accounting standards, all fourteen volumes and sixteen rolls are the accounting records of a profit-seeking organization and with the objective of being both a public statement of accounts for outside investors and internal administration. While the 1941 definition of accounting held by the American Institute of CPAs (AICPA) emphasized the practical art of summarizing recorded categories of financial transactions, the reestablished 1970 definition emphasizes the modern nature of listing quantitative information of a financial nature used in economic decision making, i.e. the opportunity cost of economic choices. The accounting records of Pak Yŏng Jin are comprised of journals and asset and liability ledgers, and have the practical art of summarizing credit, debit and account calculations, therefore corresponding to the AICPA’s 1941 definition of accounting. Not only that, but the capital procured through financial activities for the administration of ginseng fields such as land for farming, the acquiring of fixed assets for the development of buildings for ginseng, the ending, collection, and payment of cash, promissory notes, and taxes for operating activities in the Individual Accounts In the Second Year of K ŏnyang , Ch ŏngyu Year, Third Month ( K ŏnyangyiny ŏnch ŏngyusamw ŏlilsangkiilkakinhwegyech ’aek 建陽二年丁酉三月日上吉辰各人會計冊) and Individual Accounts In Fourth Year of Kwangmu In the Taehan Empire, Ky ŏngja Year, Ninth Month ( Taehankwangmusa ny ŏnky ŏngjakuw ŏlilsangkiilkakinhwegyech ’aek 大韓光武四年庚子九月日上吉辰各人會 計冊) meet the requirement of the 1970 AICPA definition of financial quantitative information for making economic decisions. The first occasion when Kaesong Double-Entry Bookkeeping (KDEB) was made known to the world was in 1916 with the publication of Silyongchasusagae songdoch ’ipub ŏp (實用自修四介松都治簿法) by HyŏnByŏngju (玄丙周). Although there were countless studies of the accounting methods of the Kaesŏng merchants after its publication, the lack of sources was the decisive factor for proving the perfection of the double-entry bookkeeping methods of Kaesŏng merchants. The materials recognized worldwide as presenting the first method of doubleentry bookkeeping are Italy’s Summa de Arithmetica , Geometria , Proportioni 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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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portionalita by Luca Pacioli in 1494, with the section on double-entry bookkeeping first translated by John B. Geijsbeck in Ancient Double -entry Bookkeeping and the 1924 publication An Original Translation of the Treatise on Double -Entry Book-Keeping by Pietro Crivelli, F .C.R.A, by the AICPA. Although Han’s publication was two years after the 1914 English translations of Pacioli, it was two years before the 1918 Japanese translation by Kobe University’s Hirai Yasutaro. It is quite interesting that the Silyongchasusagaesong doch ’ipub ŏp of Korea’s traditional DEB was published in between the English and Japanese translations. This is because the accounting scholar Yasutaro researched KDEB for eight years from 1918 to 1925 and presented the findings in 1925 Germany. (Hirai, Yasutaro und Alfred Isaac, Quellenbuch der Betriebwirtschaftslehre , Speath&Linde, Berlin 1925). KDEB was also presented by Taekyŏng Publishing (大耕出版社) in the Family Registry of the Kaebu Branch of the Muan Pak Clan (務安朴氏開府波世譜全) in 1974. The renewer of the Mu An Pak Clan, Pak Chin Sŭng (朴進昇), passed the civil service examination in letters as a fourth generation descendant of Wansantaegun Pak An Hwa (完山大君朴彦華), the sixth son of the fifty fourth king of Shilla, King Kyŏngmyŏng, and was rewarded with the village of Muan for his service as Kukja Cheju (國子祭酒) in Koryo. In the Family Tree of the Pak Ancestral Lineage, it shows the originator of the line as Pak HyŏkKŏ (朴赫居), with Pak Chin Sŭng being a thirty fourth generation descendant. The present day shrine of the Mu An Paks is located in Pyŏngsan of Kojŏl Village, Muan Town, Muan County, Chŏlla Province. The lineage records that they settled in Kaesŏng around 1600, with Pak YŏngChin (1935-) being the nineteenth Hwi In generational descendant (19世諱仁), son of Pak Tong Sun 朴東淳(1804-1821), son of Pak KŏnHyŏng 朴健炯 (1853-1908), son of Pak Tong Po 朴東輔 (1830-1907). Pak YŏngChin 朴永璡(1935-) is recorded as being the eldest son of Pak Hang Chong 朴恒鐘(1910-1965), the eldest son of Pak KŏnHyŏng, Pak Chae To, 朴在燾(1883-1942). The first journal of the accounting records starts with the ‘ Ch ŏnggak Year Eighth Month (1887)’ and are thought to be the accounting records of two generations of business management by Pak Tong Po and his eldest son Pak Chae 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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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ong the sons-in-law, daughters-in-law, and close friends recorded in the family register in the Kaepu Branch of the Muan Pak Clan, there are three people of considerable importance. The first is Chang Gang Kim TaekYŏng (滄江 金澤榮, 1850-1927). The preface of the family register indicates that the epigraph on Pak KŏnHyŏng’s tombstone is written by Kim TaekYŏng. Among the works under the pen name, So Ho Tang (韶濩堂), which include A Short History of Korea ( Hanguksosa , 韓國小史), Hansakye (韓史綮), An Edited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 Kyoj ŏngsamguksagi , 校正三國史記), Chang Gang’s Manuscripts ( Changgangko , 滄江稿), and Collected Writings of So Ho Tang ( Sohotangjip , 韶濩堂 集), the one most closely linked to Pak’s accounting records is the Treatise on Red Ginseng in the eighth volume of the Collected Writings ( Hongsamji , 紅蔘誌). This work summarizes the origins and as-of-then state of the administration of ginseng fields by Kaesŏng merchants. The Individual Accounts in the K ŏnyang Second Year, Ch ŏngyu Year, Third Month and Individual Accounts in the Kwangmu Fourth Year of the Taehan Empire, Ky ŏngja Year, Ninth Month as seen in the attached photograph are the supplementary statement of accounts of the ginseng fields managed by Pak Yŏng Jin’s family. Kim was born three years before Pak KŏnHyŏng, but as he lived twenty years longer, he is thought to have been able to observe the management of the ginseng fields in greater detail. As an intimate link exists between the Treatise and the Pak’s ginseng field management, we can expect a more detailed account of them through future studies. The second figure who draws attention in the family register is Kong Sŏng Hak (孔聖學, 1879~1957). In page three hundred and eighty seven of the family register, it lists Kong as the son-in-law of Pak Sun Hyŏng (朴舜炯, 1851~), the eldest son of Pak Tong Hŏn (朴東憲, 1825~1895). Learning Korean traditional medicine under Kim Tae Yŏng and proficient in poetry, he served in the post of Pujehak at Sungkyunkwan Academy and led a revolution in improving the agricultural methods of raising ginseng and sonbongsang (孫鳳祥) and founded the Kaesong Co. (開城商會) in 1938 (Cho Ki Jun, A History of Korean Enterprise, Pak Yŏng Publishing, 1983). Finally, the last figure is found on the basis of investigating the individu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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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counts of recorded transactions and comparing them to the nature of the business organizations of Kaesŏng merchants. In the process of investigating the original records, it was discovered that volumes were bound in luxurious silk of a feminine design and the name Pal Kok from Pal KokTaek ( Pal Kok , 鉢谷宅) was mentioned as a proprietor, which was the name of Pak’s lands for the costs of ancestral rites. In present-day accounting, there are six categories of accounts: assets, liabilities, proprietorship, income, costs, and reconciliation of surplus. Among those categories, proprietorship accounts are entries that journalize initial investments or accruals periodically as an increase in credit and increase in debit when business owners have increased their invested capital. The first credit investor in Pak’s asset and liabilities ledgers is Pal KokTaek. Until now, the nature of the Pal KokTaek was unknown but it can be confirmed from the rolls that Pal Kok is the name of the lands that paid for the costs of Pak’s ancestral rites. Hence, it was confirmed that Pal KokTaek was the madam managing the ancestral rites of the Pak House as well being one of their proprietors. In today’s accounting, proprietorship accounts sum up the calculated net profits or losses from the business activities of companies in their capital accounts or their savings are disposed of as dividends in individual enterprise organizations. We can deduce from Pal KokTaek’s account whether or not Pak’s business management organization was an individual enterprise or a company . In sum, Pak Yŏng Jin’s fourteen volumes, in contrast with the already known 1786-1947 accounting ledgers in the North Korean Social Science Academy and those from 1854-1918 in Kobe University, contain final profit-loss statements in their journals from which one can deduce the process of economic transactions and thus are a perfect set of accounting ledgers. When compared to the 18541918 accounting ledgers at Kobe University and the 1786 Kaesŏng merchant ledgers introduced in 1962 by North Korean scholar Hong Hŭi Yu with the KDEB (Kaesong Double Entry Bookkeeping: KDEB) liability ledgers, all three are the same in form and terminology . The first person in Kobe University to collect and study Pak’s KDEB ledgers was Hirai Yasutaro, who concluded that ‘The accounting records of the Kaesŏ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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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rchants are not double-entry bookkeeping records according to today’s definition’ as a result of not finding the link between the credit, liability, and balance sheets. His skeptical conclusion is worthy of attention in light of the perfectly unified structure of the accounting records which is sure to draw contrary results. Although the North Korean sources are an enormous amount consisting of 2,027 pages, they were not a single household’s records so links between the balance sheets of periodic net incomes in the journals and general ledgers cannot be drawn, but the discovery of the Pak KDEB accounting ledgers in 1962 by North Korean scholar Hong Hŭi Yu introduced the 1786 Kaesŏng merchant accounting ledgers and for the first time established for certain that ‘rational capitalism’ existed in the form of DEB in latter eighteenth century Korea through the structure and form of the accounting records, their journalizing terminology, and general ledger records. If we are to summarize the publicized materials, the Pak Yŏng Jin Family’s accounting records are a perfect 1,298 page set containing everything from daily journals, general ledgers, credit and debit balance sheets, and profit-sharing calculations in DEB form from 1887 to 1912, a singular source. The discovery of the content and characteristics of the Pak Family’s accounting records and success of the change to modern accounting methods in them, along with 1786-1947 records in the North Korean Social Sciences Academy and the 1854-1918 records at Kobe University, can be analyzed according to modern day business administration analyses of their stability, profitability, and development of their financial structures and their periodic net profits calculations in their journals recorded in DEB without a single error prove that this source is written in modern day double-entry bookkeeping. The research trends in the United States, Europe, and the rest of the world on DEB are on sources written in ‘medieval age DEB’ where all transactions are journalized according to credit and debit and can be seen as medical reports on modern-day enterprises. That is, they define credit and debit balance sheets, income balances, and accumulated earnings balances as ‘modern double-entry bookkeeping’ and carry research on them according to this definition.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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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atest characteristic of the Pak Family accounting records is its ‘modern double-entry bookkeeping’ which fulfills the universal accounting principles and is comparable to that of contemporaneous American and European records. Cost accounting was not systematically recognized until 1885 in England (This is indicated by both American and European scholars A.C. Littleton and Michael Chatfield). In Germany, recognition of ‘modern double-entry bookkeeping’ has only spread in the social sciences with the W. Sombart’s 1924 Der Moderne Kapitalismus and Max Weber and Schumpeter’s analysis of the link between capitalism and DEB in the social sciences. At the practical level, formal cost accounting practices did not even exist in the United States and United Kingdom until 1900, up till the H.L. Arnold’s “The Complete Cost-Keeper” (“The Complete Cost-Keeper,” 1899. New York: Engineering Magazine Press 1899). On the absence of such sources with these practices, Garner’s 1954 publication Evolution of Cost Accounting to 1925 (University of Alabama Press) concluded that before 1885 there was some interest in cost accounting theory and practices, but almost no experts thought that cost accounting was worthy enough of being a problem, not to mention any sources. Cost accounting management was thought be first presented by H.L. Arnold’s “The Complete Cost-Keeper” (Businesses did not keep cost accounting records). On the other hand, the 1897-1905 Pak Family ledgers on ginseng fields from its journals, general ledgers, credit and debit balance sheets, net profit balances, and its accumulated earnings distributions were all linked together by DEB and are singular as a source in their perfecting of principles for balancing debit and credit to their accumulated earning distributions between investors and managers before the 20th century and for being ‘modern DEB cost accounting records’ in world accounting history .

Key Words double-Entry Book Keeping, Kaesŏng Double-Entry Bookkeeping, Modern Double-Entry Bookkeeping, Cost Accounting

 

개부파

   개부파(開府派)는 
15세  高敞縣監公 諱 평(坪)의 子 인 16세 諱 대년(大年)이 派祖이시며
17세 諱 억중(億中), 18세 諱 덕사(德思)까지 경남 함양에 거주 하시다가
19세 諱 인(仁)께서 개성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신 이래로 개성이 세거지가 되었다.


 

    개성의 역사와 남겨진 문화재

            

                                                          홍 영 의(개경학연구소 소장)

   

1. 고려 태조 왕건이 송악에 수도를 정한 까닭 - 경기와 수도의 입지조건

  고려의 수도인 개경의 입지는 전체적으로 구릉지대로서, 

북쪽-천마산(天摩山, 762m), 국사봉(國師峰, 764m), 제석산(帝釋山, 744m) 등과 

동북쪽-화장산(華藏山, 563m), 동남쪽-진봉산(進鳳山, 320m), 서북쪽-만수산(萬壽山, 228m) 등이 도시의 외곽을 에워싸며, 

북쪽의 송악산(松嶽山, 488m)으로부터 남쪽의 용수산(龍岫山, 177m)으로 연결되는 구릉들이 시가지 주위를 둘러싸 경계를 형성하고 그

 능선을 따라 성곽(羅城)을 쌓아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방어하였음.

 

  또한 집권층과 수도민의 경제적 토대인 농지면에 있어서도 앞에는 예성강 유역의 신광(新光), 연백(延白) 평야, 사천강 유역의 사천평야, 임진강 하류의 장단(長端) 평야, 한강하류의 풍덕(豊德), 김포(金浦) 평야 등 드넓은 농경지가 있어서 경제생활에 필요한 모든 물자를 충분히 확보할 수 있는 잇점도 있음. 

여기에 동쪽으로는 임진강(臨津江), 동남쪽으로는 사천강(沙川江)과 황해로 나가는 예성강(禮成江)이 있어서 벽란도(碧瀾度)에는 전국 각처에서 들어오는 각종 세공(稅貢)과 물자들이 쌓일 수 있었고, 중국이나 외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상선(商船)들이 머물 수 있는 좋은 해상수송로를 가지고 있음. 

이러한 입지조건은 수도가 지녀야 할 제일 조건에 해당하는 것.

 

원래 한 나라의 수도가 정해지기 위해서는 몇가지 조건을 필요로 함. 

즉 왕조가 바뀌어 수도를 옮기지 않는 한, 집권자의 정치적 이익과 백성들의 이해여부,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경제적 입지조건과 자연지리적 환경을 중시한 보안(保安)의 기능을 지닌 지역이 우선 되어져야 하고, 다시 그 지배의 정점에 위치한 국왕의 발상(發祥) 근거지가 서려있는 곳이 고려됨. 

개경은 이러한 특징 가운데 하나인 국왕의 발상 근거지와 일치하고 있어서 고대의 삼국의 수도나 조선의 한양과는 다른 면이 보임.

 

  다소 설화적인 표현으로 윤색되어 있으나,『고려사(高麗史)』고려세계(高麗世系)에 인용되어 있는 김관의(金寬毅)의 『편년통록(編年通錄)』내용을 종합해 보면, 

왕건 집안은 원래 부소산(扶蘇山)을 중심으로 거주해 오다가 서강(西江) 영안촌(永安村 : 개풍군 남면 창릉리) 지역의 해상부호와 결함함으로써 예성강 하구를 중심으로한 큰 세력으로 부상한 다음, 왕건의 조부인 작제건(作帝建) 대에 4주 3현에 걸치는 세력을 확보하고 부친인 왕융(王隆) 대에 이르러 경기 북부 예성강지역 일대의 대표적인 지방세력으로 등장하였음.

 

  또한 여기에 적절히 풍수도참을 적용하였다는 점도 고대 삼국의 수도와는 다른 특징.

 원래 개경은 마두명당(馬頭明堂)이니 부소명당(扶蘇明堂) 또는 송악명당(松嶽明堂)이니 하여 이른바 명당의 땅으로 일컬어졌던 곳. 

예컨데, 신라 감간(監干) 팔원(八元)의 “만일 군(郡)을 산남(山南)에 옮기고 솔을 심어 암석이 드러나지 않게 하면 삼한을 통합할 자가 나오리라”는 언급이나,

 “이 지맥이 왕방인 백두산 모목간으로부터 내려와 마두명당에 떨어졌으며 그대는 또 수의 명수를 지녔으니 마땅히 수의 대수를 좇아 집을 짓되 66으로하여 36구를 만들면 천지의 대수에 부응되어 명년에는 반드시 성자를 낳을지니 이름을 마땅히 왕건이라고 지으라”고 하였던 도선(道詵)의 풍수설과 왕융(王隆)이 궁예에게 “대왕께서 만일 조선(朝鮮)․숙신(肅愼)․변한(卞韓)의 땅(한반도와 만주일대를 가르킴)에 왕이 되시려거든 먼저 송악에 성을 쌓고 나의 장자(長子)로써 그 성주(城主)를 삼으소서”라고 하여, 이곳에 발어참성(勃禦塹城)을 쌓게 하고 왕건을 성주로 삼게 하는 등 도읍을 옮기게 하였던 일은 풍수지리의 시대적 분위기를 짐작케하는 것임.

 

  특히 왕융의 의도는 궁예를 자신의 세력내로 불러들여 자신의 지역적 위상을 보장받는 동시에 도읍을 이곳에 자리잡게 하여 경제적 이득 또한 꾀하려 했던 것. 

궁예 또한 최소한 경제적으로 국가재정의 기반을 안정적으로 제공받을 수 있는 곳을 필요로 하였기에 자연스럽게 철원에서 도읍을 옮기게 된 배경이 되었을 것. 

그러나 궁예는 이 지역이 세력판도를 확장할 수 있는 거점으로 용이한 지역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왕건의 세력확대에 대항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불안정한 정권 기반에 따른 불안감의 가중으로 인하여 왕건을 중심으로 하는 송악지역의 해상지역을 벗어나 다시 내지의 농업경제적 기반을 가진 철원으로 천도함.

 

  이러한 분위기는 철원에서 고려를 세운 왕건에게도 그대로 적용됨. 왕건의 쿠테타가 비록 성공은 하였지만, 궁예의 지지세력과 지방세력의 반발과 동요를 가져옴. 쿠테타 직후 발생한 환선길(桓宣吉), 이흔암(伊昕巖)의 역모사건과 적지 않은 철원과 충주지역의 친 궁예 지지세력은 왕건을 위협하는 직접적인 요소가 되었으며, 정치력이 취약한 조건속에서 왕권을 안정화를 도모하기 위해서는 수도를 자신의 정치, 경제적 기반이 확고한 연고지로 옮기지 않을 수 없었던 것. 

이로써 신라의 변방으로 위치하였던 송악은 꾸준히 성장해온 왕씨 해상세력에 의해 한반도의 중심부로 자리잡는 계기가 되었고, 그동안 누려왔던 신라 경주 중심의 정치․경제․문화를 국토의 중앙으로 옮기게 되었던 것.

 

  경기는 왕실과 왕경을 보위(保衛)하는 울타리 - ‘근본이 되는 곳(根本之地)’, ‘사방의 근본(四方之本)’, ‘왕의 교화가 먼저 미쳐야 할 곳(王化所先)’으로 중시. 

본래 경기제도는 한(漢) 이래로 역대 왕조에 걸쳐 계승 발전해 온 것으로, 천자(天子)를 정점으로 하는 정치적 지배질서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함. 

경기는 신분질서를 영역 구분에 적용한 것으로, 왕실은 등차적 질서론에 따라 왕기(王畿)를 설치하고 특별하게 취급함으로써 권위를 확보하려고 함.

 

   우리나라에서 정식으로 제도로서 성립된 때는 1018년(현종 9)임. 

『고려사』지리지의 왕경(王京) 개성부(開城府) 조항에 따르면, 이전부터 존속해오던 개성부를 없애고 개성현령과 장단현령(長湍縣令)을 두어 

각기 3개의 현과 7개의 현을 관장하게 하고 이를 경기(京畿)라고 부름.

 

  919년(태조 2) 개성을 중심으로 한 지역을 개주(開州)로 삼았고, 

995년(성종 14)에 당의 제도를 수용하여 개주를 개성부로 승격시키면서 개성부윤을 두어 6개 적현(赤縣)과 7개 기현(畿縣)을 관할케 함. 

적․기 13현은 개경이 위치한 송악현을 중심으로하여 그 주변에 자리잡은 개성(開城)․정주(貞州)․덕수(德水)․강음(江陰)․장단(長湍)․송림(松林)․임진(臨津)․토산(兎山)․임강(臨江)․적성(積城)․파평(坡平)․마전(麻田) 등을 소속시키고, 

경기로 불리는 12현을 관할하는 중앙관서로서 종3품 내지 정4품 정도의 지위에 있던 부윤(府尹)을 비롯한 소윤(少尹)․판관(判官)․장서기(掌書記)․법조(法曹)․참군(參軍) 등을 두어 업무를 처리. 

1018년(현종 9)에는 수도 개성을 독립시키고, 적현과 기현을 합하여 2개의 주현과 10개의 속현으로 편성하여 이를 ‘경기’라 칭하고 상서도성(尙書都省)으로 하여금 직할함.


  경기가 도(道)로서 확립된 시기는 

1390년(공양왕 2) 경기를 확장하여 좌도와 우도로 나누고 각기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士)를 둔 때부터임. 

원래의 경기 13현에 새로 31현을 합쳐 44현으로 하고, 좌두 25현, 우도 19현으로 나눔(1390년의 경기확장은 과전법을 시행하기 위한 준비의 일환임).

 

  개성이 한 나라의 수도로서 주목되기 시작한 때는 

1100여년전 궁예가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기 전인 898년부터 905년까지 8년간.

 역사의 전면에 한 나라의 수도로서 재등장한 때는 왕건이 918년 고려를 건국한 이듬해인 919년(태조 2) 정월에 송악으로 천도하면서 부터임. 

때부터 개경은 고려시대 수도로써 473년의 역사를 가진 도시로 발전.




  개경만이 지닌 특징.

1) 고대 삼국의 수도와 다른 자연환경적인 풍수지리설을 이용하였다는 점.

2) 중국의 역대 수도에서 보여지는 전조후시(前朝後市)나 좌묘우사(左廟右社)의 개념에 의해 수도가 구획되었다는 점.



  조선의 한양과 다른 점.

1) 고려는 개경이외에도 서경(西京)․동경(東京)과 남경(南京)을 배후도시로 이용(서경은 고려전기, 남경은 고려 중․말기)

2) 개경이 자연적 도시라면, 한양은 개경의 장점을 본받은 철저한 계획도시





2. 500년 도읍지 개경의 터 다지기

 

  개경은 송악산 남쪽에 자리잡은 만월대를 중심으로 한 송악군 일대와 함께 지금의 개풍군 개경리를 치소(治所)로 삼았던 개성현의 일부까지 포함하는 지역에 위치함. 

여기에 이미 축성되어 있던 송악성과 발어참성을 기반으로 궁성과 황성을 조성하여 국도(國都)로 기능함.


  919년(태조 2) 정월에 송악 남쪽에 수도를 정하여 궁궐을 건축하고,  3성(省) 6상서(尙書) 9시(寺)를 설치, 

시전(市廛)을 세우고, 방리를 구분하여 5부를 나누고, 6위를 두었다는 기록은 수도로서 위용과 기능을 다할 수 있도록 한 면모를 보여주는 것.

 

  여기에 방어상의 어려움 때문에

 다시 1009년(현종 즉위년)에 강감찬(姜邯贊)의 제의에 따라 1029년(동왕 20)에 23km의 장대한 나성(羅城 : 성문 25개로 4대문과 중문 8, 소문 13로 구성)이 완성됨으로서 최종적인 행정구역의 획정․정비가 이루어지게 됨. 

또한 내성(內城 : 8개의 문으로 구성)은 나성이 너무 커서 수도성 방어에 불리하다는 점(1377년, 우왕 3년에 논의)) 때문에 1391년(공양왕 2)에 건설을 시작하여 1394년에 완성함. 

따라서 개경의 내부구조는 결국 궁궐, 황성, 내성, 외성으로 구획되어 있으며, 이들 지역에는 주요 통로마다 여러 성문을 배치하여 물자와 인구의 출입을 통제함.


 

『고려사』에 궁전의 이름이 전해지는 것이 약 110여 개가 될 정도로 많은 전각이 건설. 

우리가 만월대(滿月臺)라 부르는 회경전(會慶殿)을 중심으로한 정궁과 장경궁, 좌춘궁, 우춘궁, 수창궁 등의 이궁․별궁들이 들어섬.

 

  정궁인 만월대는 

919년에 건설된 후 거란, 홍건적이 침입하였을 때와 이자겸(李資謙)의 반란 등으로 여러 차례 화재를 겪기도 하였으나, 

북쪽의 송악산을 배경으로 그 남쪽의 구릉지대에 위치함. 

다른 궁전들과 달리 높이 흙을 돋아 석축을 한 언덕진 곳에 자리하였음. 

이것은 이른바 ‘지기(地氣)’를 손상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지리도참설(地理圖讖說)’과도 관련시켜 설명돨 수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 궁전 중심부의 건축적 위용을 과시하려는 목적을 추구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음.

 

  만월대는 

정전인 회경전과 장화전․원덕전을 중심으로 승평문(남)․현무문(북)․동화문(동)․서화문(서) 등 4개의 문으로 구성된 입구 지역과, 

서쪽에 정전과 연결되어 조회를 받고 손님을 맞던 내전과 같은 기능을 한 선정전․건덕전을, 침전의 기능을 하였던 장령전․연영전․자화전․만령전을 건립함. 

장령전은 왕이, 만령전은 비빈들의 침실이었음. 

이밖에도 

회경전 동쪽의 수 만권의 서적을 보관하는 임천각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도서(圖書)들이 있던 보문각, 청연각 등의 건물과 

동쪽에는 좌춘궁이, 동남쪽에는 둘레 약 1km인 동지(東池)가 있었음. 

또한 만월대에는 개별적인 주요건물과 직접 연결시켜 조성한 정원과 계곡과 산봉우리를 이용하여 꾸민 유흥터들이 조성됨.

 

  만월대의 뒤 자하동, 11세기 말의 청연각 주변의 정원, 12세기 중엽 관복궁의 정원, 중미정 남지, 판적요에 있는 만춘정 주변, 

의종대 민가 50여 채를 헐어 버리고 세운 태평정․관란정․양이정․양화정과 고려말 이현(梨峴)에 있는 정원들이 대표적인 것들임.

 

  황성은 4각형 모양의 방형성임. 

궁성의 외곽 방위성으로, 중앙관청들이 있어서 나성이 완성되기까지는 외성의 역할을 하였고, 고려말에 새로운 내성을 쌓기까지는 내성의 역할을 하였음. 

『고려도경』에 의하면, 왕부의 내성에 13개 성문이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여기서 말한 내성이란 곧 황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임. 

황성에는 20개의 문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지금 11개의 문터가 알려져 있음.

 

  정문은 광화문으로 황성의 동남쪽에 위치하였고, 

궁성 쪽으로는 상서성, 추밀원․중서성․문하성과 어사대가, 앞의 대로를 ‘관도(官道)’라 하여 호부 등 6부와 각종 중요 행정관청이 자리하고 있었음. 

이러한 점은 조선의 한양과 다른 점임.

 

  이렇게 궁궐과 관아 등이 세워지고, 수많은 사원과 민가들이 들어서는 등 수도의 외형이 점차 갖추어지자, 

이를 관리할 행정조직인 부(部)와 방리(坊里)를 구획․확정함. 

????고려사???? 지리지의 왕경개성부조에는 부방리제가 완결된 형태, 

즉 5부 35방 344리의 모습을 갖추는 시기가 1024년(현종 15)으로 되어 있음. 

그러나 이때는 지역의 확대 고정에 따른 마무리 단계였고, 대체적인 틀은 고려초부터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임. 

태조 2년의 기사와 성종 6년에 ‘5부방리를 경정(更定)하였다’는 내용은 이를 뒷바침해 주는 것임.

 

  5부의 영역구성은 동부 7방 70리, 남부 5방 71리, 서부 5방 81리, 북부 10방 47리, 중부 8방 75리로 편성됨. 

이들 중 방명은 사원, 성문의 이름이나 산천 내지는 그 이외의 어떤 다른 지형들과 관련되어 붙여지고 있음.

 이 칭호들은 어떤 이유에선지 모르겠지만, 시기를 달리하여 새로운 이름으로 바뀌거나 새로이 등장하는 것도 보임. 

또한 리명의 경우, 공식적으로 행정적인 촌락으로 국가에서 파악할 때는 모부(某部) 모방(某坊) 제○리(第○里)라 표기되고 일반인 사이에는 고유명사로 혼용되어 불리어졌음. 이 역시 관청이나 궁궐 또는 사원 또는 산천 등 지형지물에서 유래한 지역적 특징을 이용한 것임.

 

  이와같은 개경의 도시구조와 행정체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경제규모의 발전과 인구팽창과 같은 문제로 영역의 확대를 필요로 하였을 것이고, 때로는 외부의 침입으로 수도의 면모가 무너지는 경우도 있었을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변화속에서 수도의 영역과 기능은 고려말까지 확대 팽창하면서 존속하였을 것임.



3. 개경의 경제생활, 지배층과 일반민의 거주 모습

 

도시는 대체로 일정한 범위의 지역 내에서 정치․경제․문화적으로 중심이 되고, 유통 조직으로서의 시장을 가지고 있으며, 상공업을 비롯한 다양한 생업에 종사하는 여러 신분 계층이 사람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곳. 

고려시대 이러한 도시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곳으로는 개경이 대표적. 물산의 집산지이며, 사회․문화의 역사적 중심지로서 개경이 지닌 의미는 그만큼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기 때문.

 

  그러면, 대도시민 으로서의 개경민은 경제생활을 어떻게 영위해 갔으며, 

또 그들은 일반 지방민과 다른 어떤 특혜를 받았고, 민들은 국가에 어떤 식으로 봉사하였을까. 

그리고 개경에 거주하는 민의 모습은 어떠하고, 인구는 얼마나 되었을까. 

이러한 의문은 당대의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닐 뿐만 아니라 도시의 제반 형태를 이해하는 과제임.

 

  개경민의 경제활동은 주로 시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짐. 

개경 시전 건물의 소재와 그 모습은『고려사』희종 4년 7월 정미의 “대시(大市의) 좌우의 장랑(長廊)을 다시 조영하였는데,

 광화문에서 십자가까지 모두 1008영(楹)에 이르렀다”는 내용은 기존의 시전을 크게 확대한 것임. 

전국 각처의 사람과 각종 물물의 유동량이 많은 여기에 때로는 국가가 차(茶)․술(酒)․음식 등을 파는 점포를 개설하여 화폐를 사용토록 하였는가 하면, 

공장과 상인들은 최대한의 이윤을 위해 저질 은화(銀貨)나 미곡(米穀)을 유통시켜 막대한 이득을 챙기기도 함.

 

  이러한 추세속에서 시장은 본래의 기능을 잃고 

‘부상(富商)’ 또는 ‘호상대고(豪商大賈)’로 불리우는 자들이 출현하여 권세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경제적 가치가 높은 물품을 확보해두고 

이를 높은 가격으로 판매하는 등의 상업활동을 통해 자신의 부를 축적. 

또한 개경내의 많은 사원들도 경제행위에 참여하여 막대한 이득을 얻기도 함. 

그리고 소상인과 도시의 부유인구(浮遊人口)에 의한 상공업 행위도 있었음. 

이들은 몰락한 나머지 농업에서 일탈하여 실업․반실업 상태에서 짚신․유기(柳器) 등을 만들고 어물․소금․땔감 등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부류들임. 

이들을 통하여 일반 중앙 관원들과 도성 거주민은 포미(布米) 등 현물이나 화폐로 자신이 필요한 물품을 매매함.

 

  초기 무인정권하에서 

권력을 쥔 무인들이 개경의 시전 거리에 있는 공장(工匠)의 집을 폭력적으로 염가에 매입한다든가, 

시전의 이익과 관련하여 청탁을 들어주지 않은 시전감독관을 위협한 일, 

공물의 대납(貸納) 등을 맡은 경주인(京主人)에 무인이 등장한 점 등은 상업의 발달이라는 측면에서 개경 중심의 대도시 유통구조의 장악이 얼마나 중요한 일임을 알려주는 것. 

결국 수도를 중심으로 한 도시유통경제는 지배층을 주요 소비층으로 한 고급상품의 제조와 판매로 특징지워지며, 정부가 필요로 하는 물품을 조달하는 장으로 기능함.

 

  한편, 중세국가의 수도는 단순한 행정도시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지배신분층인 귀족과 관료집단의 거주지이며, 그들의 정치적․경제적 특권을 유지하는 기능도 함께 지니고 있음. 중앙 집권적 체제 역시 수도를 중심으로 한 지배집단의 특권을 더욱 확고하게 보장하며, 

그것은 수도주민의 편성방식에 일정한 원칙을 적용하여 특정한 이득도 마련해 주려는 의도.

 

  예컨데, 개경의 부인(富人)들에게 

선의문(宣義門) 내의 한지(閑地)에 큰 길을 따라 기와집을 짓게 한다던가, 

국가재정이 부족할 경우에는 개경민에게 차등적으로 거두어 들이는 한편으로, 

흉년일 경우 진휼미를 우선적으로 지급해 주는 등 특별한 대상으로 파악되기도 하였음.

 

  개경은 왕경인 만큼 

나라 안의 다른 지역들에 비해 그 주민의 신분적 구성이 매우 다양. 

궁성이 왕과 왕족의 거주 구역임은 말할 나위도 없고, 고위 관료로부터 하급 관원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도성 내에 자신의 집들을 소유함.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이들 가운데 큰 집은 3~4구로 되어 있었는데, 그 면적이 몇 리에 가득찼다고도 하며, 

정함(鄭咸)의 경우는 대궐 동남쪽 약 30보 밖에 있었는데, 행랑이 무려 200칸이고 곳곳에 누각이 솟아 있고 채색이 서로 비쳤으며 그 구조는 왕궁과 비슷하였다고 할 정도로 대저택을 짓고 살기도 하였지만, 개중에는 경제여건상 집을 임대한 경우도 사료상에 보임.

 

  이들은 5부 중에서 어느 특정 부에는 거주하지 않는다든가 반대로 특정 부에만 거주하는 현상은 없었고, 각 부에 흩어져 거주. 

일반민 역시 관원들 처럼 거주상의 특별한 제약은 없었던 것으로 보임. 

다만 상공업 종사자들의 경우에는 지역적 특정상 시전이 설치되어 있는 시가지 주변에 밀집하여 거주하였을 것. 

이외에도 서리들과 군인들도 신분상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지역에 거주하였을 것.

 

  개경에는 또한 관청이나 개인에게 딸린 노비들도 많았다. 

이들은 소속관청이나 개인집에서 살기도 하고 따로 나가서 호(戶)를 이루어 살기도 함. 


종교적인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있었음. 

불교 승려의 경우, 

개경 내에 수 많은 사찰이 건립되었던 만큼 많은 수가 각 사찰에 머물고 있었을 것임. 


이외에도 도사(道士)나 무당(巫堂)도 일반 여염집 뿐만 아니라 심지어 관원과 이웃하면서 솟대를 높이 세우고 무격에 종사할 정도였음.

 

  이러한 다양한 신분 구성원이 거주하는 개경은 또한 모든 물산이 모이는 까닭에 지방 각처에서 몰려든 상인과 유람객도 상당하였을 것. 

때로는 자연재해 등으로 자신의 본거지를 떠난 유랑민과 고공(雇工) 노동자들도 상당수 거리를 배회하였을 것임. 


이들이 개경의 인구로 파악되지는 않았겠지만, 

개경의 인구에 대해서는 

1232년(고종 19)의 몽고침입에 즈음하여 강화로의 천도여부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보여지는 ????고려사절요???? 권16과 ????고려사???? 권 102 유승단전(兪升旦傳)에 보이는 ‘10만호’의 기록이 유일한 내용임. 

이외에도 개경에서 빈발했던 화재사건시의 피해 가호수가 기재되어 있음. 


이를 통하여 개경의 인구는 전통적인 방법인 1호 5인 기준으로 대략 50여만에 이를 것으로 추정함. 

논자에 따라서는 개경 성내의 면적과 비교하여 믿기 어려운 수치라고 하거나,

 성내뿐 아니라 서교(西郊)와 동교(東郊)를 비롯한 성외의 호구까지 포함한 숫자였을 것으로 봄. 


그러나 개경은 한국 역사상의 수도 가운데 가장 긴 23km의 나성을 외성으로 하고 있으며, 

1,000여호로 구성된 염점동(鹽店洞)의 경우처럼 큰 규모의 리․동도 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인구수는 가능한 것임. 

더구나 1123년(인종 원년) 고려에 왔던 서긍(徐兢)은 왕성내의 민거(民居)가 지형의 높낮이에 따랐으므로 일률적이지 못하고 마치 ‘벌집, 개미구멍 같았다’고 한 표현은 다소 과장된 것이라 할지라도 가호(家戶)가 매우 조밀했던 것을 말하여 줌.

 현재의 경우에도 개경지역은 평양, 남포에 이어 북한 제3의 도시로 꼽히며 면적은 1,200㎢로 서울(654㎢)의 두배에 해당하고, 인구는 약 38만명으로 추산함.

 



4. 조선시대 개성의 변화

 

태조 이성계는 1394년 8월 고려 문종대이래 주목을 받았던 남경(南京)으로 수도를 천도. 

천도 이유로는 개경은 구신세족(舊臣世族)의 정치적 기반이라는 점, 

풍수지리설에서 “송도(松都)는 지기(地氣)가 쇠하고 신하가 임금을 폐출하는 곳”으로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 

태조는 당연히 전 왕조의 수도를 벗어나 새 도읍에서 새로운 정치를 하여 민심을 일신시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정리하고자 하였을 것.

 

  이러한 목적에서 이루어진 한양으로의 천도는 궁궐을 짓고 관아거리를 조성하는 등 비교적 순탄하게 진행됨. 

그러나 1차 왕자의 난을 겪은 뒤 재이(災異)가 잦다는 이유로 1398년 태종에 의해서 다시금 개경으로 환도. 

태종은 여기서 6여년간을 머문뒤 한양으로 천도하자고 요청하는 아버지 태조의 뜻을 받들어 다시금 한양으로 도읍을 옮김. 


이로부터 

고려 수도였던 개경은 주요 교통로마져 한양 중심으로 바뀐 탓에 한낱 사행(使行)의 길목으로만 여겨지게 되었고, 

조선조 여유있던 사대부들이 한번 쯤 가볼만 한 유람지로 인식하게 됨.

 

  이렇게 고려의 구도로 인식된 개경은 1

394년(태종 3) 유후사(留後使)를 두었다가, 

1438년(세종 20) 개성부(開城府)로 승격시키고, 경관직인 종2품 유수(留守)를 두었다. 

이때 한성부와 개성유수부, 팔도체제로 조선초기의 지방관제가 형성됨. 


그러나 이러한 개성의 중요성은 17세기 이후 변화함. 

1627년(광해군 10) 강화부가, 1793년(정조 17) 수원이, 1795년(정조 19)에는 광주부가 각각 유수부로 승격하면서 

전국의 지방제도는 경도(京都)-사부(四府)-팔도체제로 바뀌게 됨에 따라 조선초기에 비해 비중이 약화됨.

 

  그러나 

조선시대 개성은 서울, 평양과 함께 ‘삼도(三都)’로 지칭되었을 뿐만 아니라 고려왕조의 수도였던 까닭에 문화전통에 대한 일반민이 지닌 자부심은 대단한 것. 

개성사람들은 ‘서울로 내려간다’고 할 정도로 개성사람들은 한양을 인정하려 들지 않음.

 

  때문에 개성사람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정치적으로 탄압을 받음. 

개성인과 개성지역의 차별의식의 연원은 개성 거주시 조선건국에 반대하는 세력으로 몰리는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도시의 확장과정에서 보이는 토지이용면적의 부족으로 지주층으로의 성장 가능성의 저해 등이 지적될 수 있음. 

실제로 개성은 답(畓)보다는 전(田)이 많아 개간 가능성을 지닌 농지가 절대적으로 부족. 

때문에 상업이 발달할 수 밖에 없는 요인이 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여기에는 정치적 지향성을 지닌 양반이 거주할 수 있는 조건을 상실한 때문임.

 

  성종대 이후 공식적으로는 개성인의 과거응시(科擧應試)의 금제 자격이 풀렸다고는 하나 실제로 중앙의 청직(淸職)이나 현직(顯職) 등에 나가는 것이 불가능. 황진이(黃眞伊)와의 애뜻한 사랑으로 유명한 중종대의 저명한 학자였던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이 재야의 학자로 삶을 마친 이후, 개성 출신 문인과 후학들이 중앙으로 진출하지 못했던 것은 물론이고, 명종 선조 연간의 이름난 문사(文士)였던 간이당(簡易堂) 최립(崔岦),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와 명필 석봉(石峯) 한호(韓濩) 등이 현달하지 못하였던 것도 그러한 경우에 해당함.

 

  이 때문에 

일찍이 고려의 수도로서 정치․사회․경제․문화의 중심지였던 개경은 점차 쇠락의 길을 걷게 됨. 

역성혁명에 반대한 이후 오랫동안 중앙정부로부터 소외된 개성사람은 자의든 타의든 고려(高麗)의 유민(遺民)이라는 의식 때문에 벼슬길 등 정치적 진출 뿐만 아니라 정치활동을 차단한 채 스스로의 결속으로 자구책을 마련함.

 

  따라서 이들은 그들의 활로를 농업․상업․수공업 등 생산활동에서 찾아 사족(士族) 등 지식계층까지도 상업적 농업경영이나 행상 등의 상업활동에 종사하고 

때로 그를 통해 치부(致富)에 성공하는 경우도 많았음. 

이들의 상업활동은 조선후기에는 개성상인(松商)과 그들의 전국적인 유통망(松房)의 명성에서 보듯 국내외의 상품유통과정을 장악함. 

개성지역의 경제적 번영을 배경으로하는 특이한 문화의 등장과 아울러 개성지식인의 집단의식의 성장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

 

  16세기 개성지역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자료로는 

1648년(인조 26)에 김육(金堉) 등이 편집한 『송도지(松都志)』토속조(土俗條)에는 개성지역의 상업적 면모를 볼 수 있어 주목됨. 

“남자가 10세가 되면 행상에 종사한다”거나, “사람들은 상고(商賈)를 업으로 삼으며 본전(本錢)이 없으면 대출(貸出)하여 사용한다”는 것 

등의 내용은 이 지 역에서 상업이 매우 활발했음을 보여 주는 사례임. 


이러한 사례는 

개성을 유람한 이덕형(李德泂)의 『송도기이(松都記異)』에서 

"세대(世代)가 멀어져서 고려조의 남은 풍속 이 변하고 바뀌어 거의 없어졌는데 오직 장사하고 이익을 추구하는 습관은 전에 비하여 더욱 성해졌다. 

그런 때문에 백성들이 넉넉한 것과 물자의 풍부한 것이 가히 우리나라에서 제일이라 하겠다. 

상가(商街)의 풍속은 

저울눈을 가지고 다투므로 사기로 소송하는 것이 많을 듯 한데도 순후한 운치가 지금까지 오히려 남아 있어서 문서 처리할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하였음.

 

  이중환(李重煥)의『택리지(擇里志)』에서는 

“여러 해 동안 천하의 물자를 실어 들여서 혹 수백만금의 재물을 모은 자도 있다.

 이런 자는 한양에 많이 있고 다음은 개성이며 또 다음은 평양과 안주이다. 

모두 중국의 연경과 통하는 길에 있어서 거부(巨富)가 되었는데 

이는 또한 배를 통하여 얻는 이익과 비교할 바가 아니며 삼남에도 이런 무리는 없을 것이다”라고 하여

 서울에 이어 개성에 상업으로 이익을 취한 거부가 많았음을 기록하고 있음 

이러한 기록에서 개성은 조선후기까지 계속적으로 상품유통의 거점으로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음.

 

  18세기의 학자 이익(李瀷)의 『성호쇄설(星湖僿說)』의 [생재(生財)]에서는 

“개성은 고려의 옛 서울로서 한양과 가깝고, 서쪽으로 중국의 물화를 무역하여 화려한 것을 숭상하는 풍속이 있으니, 

아직도 고려의 유풍이 남아있다 하겠다. 

조선이 건국된 뒤 고려의 유민들이 복종하지 않자, 

나라에서도 그들을 버려 금고하였으므로 사대부의 후예들이 문학을 버리고 상업에 종사하여 몸을 숨겼다. 

그러므로 손재주 많은 백성들이 많아 그 곳 물건의 편리함이 나라 안에서 으뜸이다”라 하여 

개성에 대한 차별정책으로 말미암아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음을 지적함.

 

  이러한 점은 개성지역에 문과 출신자보다 무과 출신자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서도 알 수 있음. 

송도지를 증보한 『송도속지(松都續志)』에는 

문과 출신이 10명인데 비하여 무과 출신자가 258인이나 기록되어 있음. 

이것은 이 지역 이 조선개국 이래로 출사에 있어 제약을 받은 사실을 반영하는 것임.

 

  그러나 

주자학적 이념에 입각한 조선의 명분론적 사회질서 아래에서 개성의 지도적 지식인으로 대두하였던 것은 

상인보다는 지주적 기반을 가지는 개성지역의 사족(士族)들임. 


개성의 상업도시로의 발전에 편승하여 부의 축적을 거듭하여 가던 개성인 사이에서는 

개성부근 농장에 대한 경영으로 경제적 여유를 가진 이름난 지주들이 지역유지이자 지식인충으로서 하위직이나마 관직에 진출하며, 

허함(虛啣)이나마 관직(官職)·관품(官品)을 지닌 채 개성의 지역여론을 좌우하면서 대두함. 


이들 개성 지식인들은 

개성의 경제적 번영을 배경으로 정통적 유림, 산림이나 경화거족과의 연결을 통해 조선의 학문정치가 조성했던 학문적 정치적 권위의 획득을 모색하고, 

그들간의 통혼과 교류, 학연(學綠)을 통해 개성의 지역유지로 두각을 나타냄. 

이들은 개성이 지닌 특수한 조건 속에서나마 누대에 결친 지주경영으로 그들 나름의 생활방식, 문화와 사회적 존재형태를 가지게 되었으며, 

개성을 대표하는 사족으로 중앙에는 “고도명벌(故都名閥)”로 알려지고 서울의 “경화거족(京華士族)”에 비견되는 “개성거족(開城巨族)”으로 지칭되기도 함.

 

  조선후기에 와서 

개성이 보이게 된 눈부신 발전과 번영, 그리고 개성 유력 지식인의 부상은 조선정부로 하여금 보다 적극적인 개성민심의 수습을 도모함. 


조선정부는 이들 “고도명벌”과 연결하여 주자학적 지배이념의 광포(廣布)와 함께 개성인의 반조선적 정서를 무마하는 조치를 취함. 

기존의 관학으로 성균관을 유지한 외에, 

개성인의 정신적 구심점이라 할 정몽주(鄭夢周)를 주향(主享)으로 하는 숭양서원(崧陽書院)의 건립과 사액(賜額)을 선조대에 시작하여,

 광해군대에는 서경덕을 주향하는 화곡서원(花谷書院)이 창건되어 사액받고, 

그 이후 숙종대에는 고려의 충신들을 주향하는 오관서원(五冠書院)과 도산서원(道山書院)이 건립되어 각기 국가의 사액을 받기에 이르렀던 것. 


이는 개성인의 고려 회고 정서를 인정하면서, 그를 인정하기에 이른 조선 국가에의 추종을 유도하였던 조치. 

이는 곧 조선주자학의 한 상징인 율곡(栗谷)을 전향하는 귀암서원(龜巖書院)의 건립으로 이어지고, 

잇달아 조선조에 대한 충신 송상현(宋象賢) 등을 배향하는 숭절서(崇節祠) 건립과 사액의 순서로 이어지고 있음.

 

  그런가 하면 

개성이 인삼(人蔘)의 경작 ·가공·유통으로 최고의 번영을 누리던 순조대 이후에는 

진작된 개성유림들의 유풍을 과시하듯 개성인들의 주동으로 개성학계 내 각 학통의 구심인물을 기리는 숭남사(崇南祠), 라산사(蘿山祠), 신호사(新湖祠), 남산사(男山祠), 요천사(堯泉祠) 등의 사우들이 대거 건립됨. 

이는 개성지식인들이 산림(山林)의 정통 주자학풍에 접근하고 그 학통에 포섭되어 이제 그를 잇는 여러 계통의 사족들이 각 사우를 중심으로 결집, 

개성사회 내에 각기 존재를 드러내게 되었던 것. 

 

  실상 개성의 사족 지식인들은 그간 정치적으로 중앙으로부터 소외되어 왔으며, 

또 사족이라 하더라도 지체가 낮은 부류로 치부되어 차별을 받아왔음. 

러므로

 이러한 사회적 통념 아래서 영조대 이후 

산림과 그 문하 경화사족들에의 적극적 접근과 교류는 제한적 이나마 그들의 사회적 위상을 높여줌.

 

  이들은 경제적 융성과 도시적 발달을 거듭하여 가던 개성의 중요성에 부응하여 

정치적 비중이 높은 인사들이 개성의 지방관으로 부임함에 그들과 긴밀한 교유를 맺을 뿐 아니라, 

관서 지방과 중국으로 가는 경유 교통로였던 개성에 관리들과 경화사족이 번번히 왕래함을 틈타서 그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등의 기회로 교유를 맺기도 함. 

또한, 

산림학자 문하에 나아가 공부하여 학연을 맺거나 

조선정계와 학계를 주도하게 된 경화사족과의 적극적 학문 문학 교류와 

때로는 그들에 대한 경제적 지원 등으로 그들의 경제적 위치에 상응하는 정치적 문화적 영향력을 가지려 노력을 경주하고 있었음.

 

  한편 

송상(松商)의 영향력이 의주(義州)로부터 동래(東萊)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미치고 있었던 이 시기에 

이들 중 일부 지주들은 그들의 경제력을 배경으로 전장(田莊)을 용인(龍仁)·충주(忠州) 등 다른 지방에까지 확대하여 설치하거나,

 한석호(韓錫祜)·한재렴(韓在濂)처럼 서울에 경저(京邸)를 두어 생활권을 확대하든지 

최한기(崔漢綺)처럼 아예 생활근거지를 이전해 버림. 


무과출신자들이 개성출신에 대한 차별은 우려하여 개성이 아닌 인근 지역 출신임을 칭한 것 처럼, 

개성출신이라는 것이 정치적 진출의 현실적 장애였으므로 서울이나 서울 부근의 다른 지역으로의 이동 현상은 그들의 형편이 닿는 대로 더욱 확산되어 갔음.

 

  특히 이들은 조선의 그 어느 지역보다도 서울과 인접한 도시 출신으로서 개성의 도시적 발전과 상업적 번영을 경험하고 서울과의 인적 물적 교류가 빈번하였으므로 서울로의 진출에는 가장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음. 

더욱이 인삼이 아편중독의 특효약으로 알려지는 등 중국에서 큰 명성을 얻어 수요가 폭증하였고, 조선의 가장 중요한 대외 수출품으로 등장하였던 인삼의 재배와 가공·유통이 개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므로, 개성에 인삼의 경제적 이익이 집중되던 순조대 이후, 그 이권을 둘러싸고 어떤 식으로든 여기에 개입하였던 서울의 경화거족과 관료, 상인, 서리 등과 관련하여서도 개성인들의 서울진출은 더욱 확대될 수 밖에 없었음.

 

  그러나 세도정국 하에서 개성인은 그들의 실력과 집요한 정치적 진출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앙정계의 소외와 사회적 차별을 맛보아야 했음. 

그런 분위기에서 개성 지식인들은 고려고도인 으로서의 자의식이나 역사의식을 환기하게 되었음. 

한재렴(韓在濂)의 『고려고도징(高麗古都徵)』이나 임효헌(林孝憲)의 『송도광고(松都廣攷)』등이 그러한 예임. 


특히 삼포(蔘圃) 경영을 하던 지주집안 출신 김택영(金澤榮)은 그의 실력을 인정받아 사관(史官)으로 입신하여 개성인으로 드물게 중앙 관료로 진출하였지만, 

세도정치기의 부패한 정치상황에 무력감과 소외감을 느끼며 35세의 나이에 울분을 토하며 개성의 북쪽 고덕리(古德里) 골짜기에서 저술한 『숭양기로전(崇陽耆老傳)』은 바로 그러한 정황을 엿볼 수 있는 것.

 

  개성 지식인들은 개성의 역사적 전통을 정리하는 가운데 개성인 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끼며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사상적 태도를 견지하고 

이는 때때로 조선의 사회 정치상황과 체제에 대한 비판 의식으로 전개되기도 함. 

때문에 그들의 입장에서 북학풍과 문풍을 정리하여 조선 학풍·문풍의 정통적 위치로까지 올려놓은 

개성출신인 최한기(崔漢綺 1803~1877)· 이조헌(李祖憲1796~?)· 김택영(金澤榮 1850~1927) 등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遠)의 북학사상을 계승 발전시키는 일단의 역할을 수행함.

 

  개성지역은 조선후기부터 북학파가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준 곳이었기 때문에 

여타의 다른 지방도시보다 서구의 문명을 빨리 수용할 수 있었음. 

더구나 이 지역은 다른 도시에 비하여 일찍부터 개신교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개화에 대한 변화의 수용에 별 거부감이 없었음. 

이러한 점은 조선시대에 보여주었던 개성민과 개경상인이 지닌 소외의식에서 나타난 독특한 활달하고도 능동적인 자세가 저변에 깔려 있었던 데 연유함.

 

  그러나 

일제시대 개성은 개성상인의 경제권을 장악하려는 식민수탈의 전형을 보여주는 곳의 하나이기도 함. 

조선총독부 주도하에 홍삼전매권(紅蔘專賣權)을 탈취하는 등 일제가 적극적으로 개경의 상업권을 장악하려고 노력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 많은 사찰 문화재의 약탈은 물론이고, 고려 왕릉까지 도굴당함. 

이 때문에 귀중한 고려시대 개경의 유적유물은 무참히 파괴되어 그 모습조차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음. 

이후 개성인들의 노력으로 개성보존회(開城保存會)라는 것을 조직하여 문화재를 보호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고, 

서울지역 외에의 평양·경주·부여 등 삼국의 고도와 함께 개경에 개성박물관이 들어설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러한 노력이 바탕이 되었을 것임. 

그러한 자부심은 고유섭(高裕燮)의 『송도의 고적』에도 충분히 반영되었을 것임.

 

  그러나 8․15 해방과 더불어 한반도의 중심에 있던 개성은 미국과 소련에 의해서 3·8선이 그어지고 남한 쪽에 속하게 되어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한국전쟁의 발발로 개성은 열강의 이데올로기의 대결과 힘의 각축장이 됨. 

그 결과로 고려시대 수도였던 개성은 그 흔적조차 기억하기 힘들정도로 전쟁의 참화를 입음. 

심지어 만월대가 미군의 야전병원을 건설한다는 구실아래 불도저로 밀어버리는 일을 당할 정도였음. 

한국전쟁의 초기에는 개성이 전선에 위치에 있었던 까닭에 미군의 폭격으로 모든 건물이 사라지는 참혹한 일을 당함.

 전쟁의 막바지에는 정전협상이 진행된 곳도 개성의 고려동(高麗洞)에서 진행되었으며, 나중에는 판문점에서 휴전회담이 이루어짐. 

결국 열강의 비무장지역의 설정으로 개성은 북한 지역으로 편입되었고, 이후 이산가족이 제일 많은 도시가 됨.

 

  조선시대 이후 멀어져간 신비의 ‘은빚도시’라 이름지어진 고려시대 수도인 개경은 다시 그 찬연한 빛을 발휘.

 몇해년 이루어졌던 금강산 뱃길이 이제 경제특구와 관광특구로 지정된 개성의 기차길로 통일의 관문이 바뀌어 지고 있음. 

이제 꿈속의 상상에서나 보일 듯 말 듯 한 개경이 눈 앞의 현실속의 ‘통일’로 이어주는 건널목이 되어감. 

우리가 찾아갈 개경땅은 이미 발아래 밟고 있는 것은 아닐까….




5.  개성의 문화재 현황

 

개성 일대는 오랜 기간 동안 고려왕조의 수도였기 때문에 많은 고려시기 문화재가 분포함. 

즉 개성 일대에는 나성 발어참성 내성 등 성곽, 만월대 등 궁궐터, 수많은 왕릉, 절터, 관청터 등 유적지가 널려있음. 그

렇지만 북한의 문화재 종합목록이 없기 때문에 그 전모를 파악할 수 없음.

 

  최근까지 문화재관리국에서 간행한 북한 문화재 관련 서적을 토대로 추정하면 

개성주변의 문화재는 릉 31, 기타 분묘 20, 성(곽) 19, 궁터 8, 절터 53, 탑 8, 부도․비 6, 불상 1, 당간지주 2, 정각 8, 서원향교 3, 가마터 1, 기타유적 33건으로 모두 193건에 이르며, 

이 중 상당수는 고려시기의 것임. 

이것은 체계적인 종합목록을 토대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확하지는 않지만, 개성과 개성주변의 문화재의 대체적인 추세는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음.

 

  북한은 남한과 마찬가지로 문화재를 국보급, 보물급, 사적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1984년까지 국보급은 50, 보물급은 53, 사적은 73 등 모두 176개의 문화재가 지정되어 있음. 


그 중 국보급이 

개성 남대문(34), 불일사5층탑(35), 선죽교(36), 영통사5층탑(37), 영통사서3층탑(38), 공민왕릉과 정릉(39), 현화사비(40), 현화사7층탑(41) 등 8개, 

보물급이 

연복사종(30), 흥국사탑(31), 개국사석등(32), 관음사(33), 화장사 사리탑(34), 영통사동3층탑(35), 영통사대각국사비(36), 영통사당간지주(37), 현화사당간지주(38), 탑동3층탑(39) 등 10개, 

사적이 

나성(46), 반월성(47), 만월대(48), 고려첨성대(49), 성균관(50), 숭양서원(51), 대흥산성(52), 현릉(53), 7릉(54) 등 9개로 모두 27개의 문화재가 지정되어 있음.



1). 성곽과 문루

  성곽은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주민과 내부시설을 보호하기 위해서 흙이나 돌로 높이 쌓아올린 큰 담이다. 

개성의 대표적인 성으로는 사적으로 지정된 나성, 반월성(내성), 대흥산성, 지정되지 않은 발어참성터가 있다. 


그 중 고려시기 개성을 상징하는 성곽은 사적 46호로 지정되어 있는 나성이다. 

나성은 고려 건국 후 약 100년 정도 후인 1020년(현종 11)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추진되어 1029년에 완성되었다. 

둘레는 약 23킬로미터로 조선시기 한양 도성의 18킬로미터보다 더 길다. 

본래 나성은 흙으로 쌓았다. 

????고려사???? 지리지에서 25개의 성문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 중 4대문은 동쪽의 숭인문과 서쪽의 선의문, 남쪽의 회빈문과 북쪽의 태화문(북성문)이었다. 

나성에 성문이 많은 것 역시 조선시대 한양의 도성과 다른 점인데, 

지금 제대로 남아있는 나성의 성문은 하나도 없으며, 북창문과 북소문 등 내성(반월성)과 겹치는 부분의 일부 성문이  누각 없이 돌문만 남아있다.

 

  나성이 만들어지기 이전 발어참성과 황성이 확인된다. 

발어참성은 

896년 후고구려 때 송악산 기슭에 쌓은 것으로 898년 후고구려가 개성을 수도로 삼으면서 도성의 기능을 하였으며, 

고려 건국후 궁성을 둘러싼 황성의 토대가 되었다. 

????고려사???? 지리지에서는 광화문을 비롯한 20개의 황성문이 확인되지만 역시 지금 남아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황성은 현종 초 거란의 침입으로 파괴되었으며, 그 후 나성이 축성되면서 완전히 복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남아있는 발어참성터는 황성의 동쪽 정문인 광화문 근처의 흔적으로 생각된다.

 

  한편 개성에는 사적 47호로 지정된 반월성 곧 내성이 있는데, 

1393년(조선 태조 2)에 완성되었다. 

이 성곽이 축성된 것은 당시의 국력으로 규모가 큰 나성을 방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내성의 규모는 둘레가 11.2킬로미터로 나성의 반 정도였다. 

황성과 나성이 토성인 것과 달리 내성은 돌로 쌓은 석성이었다. 

내성의 북쪽과 서쪽 면은 나성 성벽을 이용하여 쌓았기 때문에 그 겹치는 나성의 서쪽과 북쪽의 일부 성벽은 석성으로 남아있다. 

내성에는 본래 7개의 성문이 있었는데, 문루가 복원되어 남아있는 것은 남대문 하나이며, 서쪽의 눌리문 등은 돌문만 일부 남아있다.

 

  지금 개성 문화재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개성 남대문은 개성시 북안동에 있다. 

이 곳은 개성의 중심지인데, 고려시기 개경의 중심도로인 십자로가 지나갔다. 

남대문은 

내성이 완성되는 해인 1393년에 완성되었고, 

한국전쟁 때 완전 파괴되었다가 1955년에 복원하였다. 

그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안팍 3포의 합각식 건물로 되어 있다. 

남대문의 현판은 조선전기의 명필인 한석봉의 글씨로 알려져 있으며, 

남대문 문루에는 보물급 30호로 지정된 연복사종이 걸려있다. 

연복사종은 1346년(충목왕 2)에 만들어져 연복사에 걸렸는데, 조선 중기 연복사가 화재로 없어지자 근처의 남대문에 옮겨 달았던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연복사종은 

우리나라 5대 종의 하나로 일컬어지는데, 모양과 무늬 등이 다른 것과 다르다. 

종의 몸체는 여러 줄의 굵은 선으로 아래 위 두 부분으로 나뉘어졌으며, 불상과 불경 및 여러 가지 문양과 종 이름 등이 새겨져있다.

 연복사는 본래 919년 고려 태조가 수도를 철원에서 개성으로 옮긴 후 도내에 창건한 10찰 중의 하나였다. 

선종 사찰인 연복사의 당시 이름은 보제사였으며, 위치는 남대문보다 조금 남쪽에 있었다. 

조선시기에 유람객이 개성에 오면 연복사에 가는 것을 빠뜨리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것은 5층층각이 있어서 그곳에 올라 도성을 굽어볼 수 있었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연복사가 불에 타 없어진 이후 연복사종이 걸린 남대문이 대신 개성 시가지를 내려다보는 망루 기능을 하였는데, 조선시기에 남대문에서 서남쪽을 바라보면 연복사탑이 보였다고 한다.

 

  개성의 성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사적 52호로 지적된 대흥산성이다. 

대흥산성은 

개성의 배후산성으로 조선시기 한양의 북한산성과 같은 기능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처음 축성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대흥산성은 천마산과 성거산의 골짜기를 끼고 축성된 포곡식 산성으로 둘레는 약 10.1킬로미터이다. 

이 곳에는 4개의 큰 문과 사이문이 있는데 그 중 북문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 

또한 4개의 수구문이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송도삼절의 하나인 박연폭포를 이루는 북쪽 수구문이다. 

그리고 대흥산성에는 대흥사와 관음사가 있는데, 

그 중 관음사는 보물급 33호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이 외에도 개성의 동남쪽에 흥왕리성지, 덕물산성지, 덕수리성지 등의 성터가 남아있다.




2). 만월대와 성균관

  뭐니뭐니해도 개성의 핵심 문화재는 궁궐이 되어야 한다. 

궁궐은 왕과 왕실의 거처이자 정치와 행정이 행해지던 곳, 곧 나라의 최고 관청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개성의 문화재는 알맹이가 빠진 것이나 다름이 없다. 궁궐이 남아있지 못하고 터만 있기 때문이다. 


고려의 궁궐터를 흔히 만월대라 하는데, 사적 48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려의 본대궐인 만월대 궁궐은 황성의 아래쪽에 자리잡은 궁성 안에 있었다. 

이것은 북쪽의 송악산을 배경으로 그 남쪽의 구릉지대에 전개되어 있다. 

경복궁을 비롯한 조선시대 궁궐이 대체로 평지에 건설된 것과 달리 흙을 높이 돋아 석축을 한 언덕진 곳에 자리잡은 것이 만월대 궁궐의 특징이다. 

이것은 이른바 ‘지기(地氣)’를 손상시키지 않으려는 의지와 관련시켜 설명될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궁전 중심부의 건축적 위용을 과시하려는 목적을 추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황성의 남문인 주작문을 지나고 궁성의 남문인 승평문을 들어서면 구정이 나오고, 

구정을 지나면 다시 신봉문이 나오며, 신봉문을 지나면 본대궐의 중심전각인 회경전의 문인 창합문이 나오며, 

회경전은 4개의 33단 돌계단 위에 놓여졌다. 


궁성 안에는 

중심전각인 회경전을 비롯하여 수많은 전각과 관청들이 널려있었지만, 

지금은 신봉문터, 창합문터, 회경전터, 장화전터, 중관전터의 주춧돌이 풀 숲에 누워 전각이 복원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만월대 법궁은 

919년(태조 2)에 건설된 이후 현종대의 거란 침입, 인종대 이자겸의 난, 고종대 몽고 침입 등을 겪으며 여러 차례 소실과 중건을 반복하였고, 

공민왕대 홍건적의 침입 때 불에 탄 후 지금까지 복원되지 못하고 있다. 

궁궐이 불에 탄 것은 1362년(공민왕 11)인데, 그 후 만월대 궁궐은 재건되지 않았다. 

공민왕은 1365년 왕후인 노국대장공주가 죽자 수년간 많은 물자와 노동력을 무리하게 동원하여 정릉 조성공사를 벌이면서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불에 타 폐허가 된 궁궐은 손볼 겨를이 없었음에도 왕후의 추모사업에는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공민왕의 행동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결국 고려 본 대궐터는 

원천석이 조선초에 ‘세월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秋草)로다’ 라고 묘사하였듯이 이미 풀숲에 묻혀있었다. 

조선시기에 이곳의 너른 마당이 여러 행사 장소로 이용되었음은 조선후기 김홍도의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개성역사박물관에는 

만월대 궁궐의 모형이 만들어져 전시되고 있는데, 이것을 토대로 문경에 개경궁궐을 만들어 놓고 역사드라마 ‘태조 왕건>을 촬영했다. 

그리고 만월대 서북쪽에는 사적 49호로 지정된 고려 첨성대가 있다. 

이것은 고려시기의 천문대로 알려져 있는데, 지금은 화강암으로 다듬어 만든 축대부분만 남아있다.

 

  만월대 법궁 외에도 많은 이궁의 이름이 전하지만 현재 위치가 확인되는 것은 많지 않다. 

공민왕 후반 이후 조선의 태조와 태종이 즉위하였던 수창궁과 

이성계가 즉위하기 전에 살았던 경덕궁(목청전)은 그 터가 남아있지만 지금 어떤 상태인지 확인할 수 없다.

 

  고려시기 개경에는 많은 관청이 있었지만 지금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사적 50호로 지정된 성균관뿐이다. 

지금 성균관는 개성시 선죽동에 있다. 

이 곳은 본래 문종대 대명궁이라는 별궁이 있었는데, 순천관 숭문관 등으로 변천되어 오다가 1310년(충선왕 2) 성균관으로 중영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특히 고려말 개혁에 앞장섰던 신진사대부들이 이곳에서 성장하였다. 

건물은 남북 중심축을 따라 앞에 명륜당이, 뒤에 대성전이 배치되었다. 

이곳에는 고려에 성리학을 전한 안향이 중국에서 직접 가져온 여러 현인들의 인물상이 있다. 

현재 개성역사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는 성균관에는 개성 근처에서 발굴된 여러 가지 유물들을 모아 전시하고 있으며, 

뜰에는 주변의 절터에서 가져온 탑들이 모여있다.




3). 왕릉, 무덤

  개성시를 중심으로 개풍군 판문군 일대에는 고려 역대 왕과 왕비, 그리고 왕족들의 무덤이 많다. 

왕릉의 경우, 

강화에 있는 2기(희종 석릉, 고종 홍릉)와 위치가 확실하지 않은 3기(우왕 창왕 공양왕)를 제외한 29기가 개성 일대에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의 왕릉 중 위치가 확인되는 것은 강화의 2기를 포함하여 모두 19기에 불과하며, 

북한에서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국보급 39호로 지정된 공민왕 현릉(玄陵; 정릉 포함)과 

사적 53호로 지정된 태조 현릉(顯陵), 54호로 지정된 고려 7릉군뿐이다.(장호수, 2000, 「개성지역 고려왕릉」 ????한국사의 구조와 전개???? 혜안)

 

  개성에 있는 고려 왕릉의 무덤구역은 크게 네 단으로 나누어 돌계단으로 연결하였다. 

첫째단에는 

봉분과 그 둘레에 돌짐승을 두고 앞에는 좌우로 망주석을 세웠다. 봉분 둘레에는 병풍석을 두루고 병풍석 주위로 1미터 정도 밖에는 돌난간을 세웠다. 

돌난간 밖에는 4 방위에 돌짐승상을 두기도 한다. 

태조 왕건릉, 공민왕릉의 병풍석에는 각 방위에 따라서 12지상을 새겼다. 


둘째단에는 정면에 장명등을 세우고 그 좌우에 문관상을 세웠으며, 

셋째단에는 무관상을 세웠다. 

초기왕릉에는 문관상만 배치되었지만, 후기 왕릉에는 무관상도 함께 세웠다. 


마지막단은 약간 넓어지면서 장자각과 능비를 세웠다. 

무덤형식은 돌칸흙무덤(석실봉토분)으로 발해와 통일신라기의 형식과 같다. 

내부구조는 대체로 외칸무덤(단실분)으로 평천정구조이다. 

안칸 바닥 가운데 관대가 놓이고 그 위에 나무로 만든 관이 놓였다. 

네 벽과 천장에는 벽화가 그려진 것이 있는데, 왕릉 가운데 벽화가 있는 것은 모두 7기가 확인되었다.

 

  개성시 개풍군 해선리 만수산에 있는 태조 현릉(顯陵)은 태조가 죽은 943년(태조 26) 5월에 만들어졌는데, 신혜왕후 유씨가 함께 뭍혀있다. 

현릉은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몇차례 이장 경험을 가지고 있다. 

즉 현종 9년 거란이 침입하자 부아산 향림사로 옮겼다가 다음해 11월 다시 환장하였으며, 

고종 4년 거란족이 국경에 침입하자 태조의 재궁(관)은 다시 봉은사로 옮겨졌다. 

또 고종 19년 강화로 천도하면서 현릉은 다시 강화로 이장되었으며, 

개경으로 서울을 옮긴 원종 11년에 임시로 이판동에 옮겼다가 충렬왕 2년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이것은 또한 1906년(고종43) 도적들에 의해 파헤쳐진 적이 있었으며, 

1950년 한국 전쟁 중에 파괴되었으나 1954년 복구하였는데, 

1992년 북한에서 발굴조사 후 새로 고치고, 1993년 5월 5일 ‘고려태조왕건왕릉개건비’를 세웠다. 

이 때 12지상을 새긴 본래의 병풍석들은 무덤 안길에 넣어 보존하고 있다. 

 

  북한에서 발굴할 때 

여러 가지 유물이 나왔는데, 그 중 금동불상은 등신불로서 현재 개성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무덤안칸에는 벽화를 그렸는데, 

동벽에 매화나무, 참대, 청룡이, 

서벽에 소나무, 매화나무, 백호, 

북벽에 현무, 

천장에는 8개의 별이 그려있다.

 

  국보급 문화재 39호로 지정된 공민왕 현릉과 왕비릉인 정릉은 개성시 개풍군 해선리 정릉동 봉명산 기슭에 있는데, 태조 현릉보다 서쪽에 있다. 

잘 알려진 대로 1365년 공민왕의 왕후인 노국대장공주가 죽자 공민왕은 직접 정릉을 만들었으며, 

1372년에 자신의 사후를 위하여 현릉을 만들어 두었다가 1374년 그곳에 묻혔다. 

공민왕은 여기에 당대 최고의 기술 및 최대의 비용과 인력을 동원하였다. 

현릉과 정릉은 1905년 경 도굴된 적이 있고, 

1920년에 일부 수리공사를 하였으며, 

1956년 개성시 문화유물보존위원회에서 다시 수리공사를 하면서 내부조사를 실시하였다. 

이 때 무덤구조와 내부시설을 조사하고 벽화를 옮겨 그렸다.

 

  공민왕의 현릉의 벽에는 12지상 그림이 한 벽에 4쌍씩 그려져 있다. 

병풍석에 그린 12지상과 같은 모습으로 공민왕이 직접 그렸다고 전한다. 

천장에는 해와 북두칠성, 3성 그림이 있으며, 안칸 동벽에는 문을 그리고, 그 밑에 네모난 구멍을 뚫어 정릉과 통하게 되어 있다. 

동쪽으로 좀 떨어진 곳에는 원찰로 세운 광통보제사의 보제선사비가 세워져있는데, 여기에는 광통보제선사와 공민왕릉의 내력이 적혀있다. 


한편 태조 현릉 주변에는 사적 54호로 지정된 고려7릉군이 있는데, 

그 주인공은 확인되지 않았다. 최근의 보고에 의하면 7릉 중 6곳은 왕릉급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4). 불교문화재

  고려시기 개경에는 개경을 불교도시라 일컬을 정도로 수많은 절이 있었다. 

조선중기의 한 기록에는 유명한 절만도 성내에 300곳이 있었다고 하였으며, 현재 절 위치와 창건연대를 확인 할 수 있는 것만도 30여 개가 넘는다. 

또한 고려시기의 절은 종교적인 기능만을 하는 장소가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으로도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남아있는 불교문화재는 그리 많지 않다. 


먼저 지정문화재를 살펴보자. 

현재 북한에서 지정된 개성주변의 불교문화재는 

국보급으로 지정된 불일사5층탑(35), 영통사5층탑(37), 영통사서3층탑(38), 현화사비(40), 현화사7층탑(41)와 

보물급으로 지정된 연복사종(30), 흥국사탑(31), 개국사석등(32), 관음사(33), 화장사 사리탑(34), 영통사동3층탑(35), 영통사대각국사비(36), 영통사당간지주(37), 현화사당간지주(38), 탑동3층탑(39) 등 모두 15개이며, 

이중 영통사와 관련된 것이 5개이고 현화사와 관련된 것이 3개이다. 또 형태로는 탑이 7개로 가장 많다.

 

  가장 많은 지정문화재를 남긴 영통사는 

개성 나성밖 동북쪽인 개성시 용흥리 오관산 남쪽에 있다. 

이것은 고려초에 창건된 절로서 고려전기 화엄종단의 대표적인 절이다. 

절터에는

 현재 국보급으로 지정된 영통사5층탑(37), 영통사서3층탑(38)을 비롯하여 

보물급으로 지정된 영통사동3층탑(35), 영통사대각국사비(36), 영통사당간지주(37)가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3기의 석탑은 모두 고려초기의 것으로 5층탑을 가운데 놓고 좌우에 3층탑이 동서로 서있다. 


또 영통사지에는 보물급 36호로 지정된 영통사대각국사비가 있는데, 

이 비는 1125년(인종 3)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의 행적을 기록 한 것이다. 

이 비문은 김부식이 지었으며 이 비문을 통하여 화엄승려로서의 의천의 활동을 파악할 수 있다. 


한편 의천의 비는 경상북도 칠곡군의 선봉사지에도 있는데, 

선봉사대각국사비는 영통사대각국사비보다 7년 늦은 1132년에 세워졌다. 

채충순이 쓴 이 비문에는 천태종 개창자로서의 의천의 모습이 드러나 있다. 


이렇듯 1명의 승려에 2개의 비문이 전하는 것은 희귀한 예인데, 

이는 천태종 개창을 통해 선종을 통합하고 교종인 법상종을 견제하여 당시의 불교계를 재편하려고 했던 화엄종 승려 의천의 활동과 관련이 있다. 

이외에도 의천이 입적한 해인 1101년에 작성된 묘지명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현재 영통사지는 남한 불교계의 지원으로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발굴을 통하여 영통사의 전모가 드러나길 기대한다.

 

  영통사지에서 멀지 않은 개성시 월고리 영취산 아래에 있는 현화사지에도 주요 문화재가 남아있다. 

현재 현화사와 관련된 지정문화재는 

국보급인 현화사비(40), 현화사7층탑(41)과 

보물급인 현화사당간지주(38)가 있다. 

이 중 현화사7층탑은 현재 개성시 역사박물관 주변에 옮겨져있다. 


현화사는 현종이 자기 부모의 원찰로 지은 법상종 계통의 절이다. 

현종은 1018(현종 9)에 국력을 기우려 현화사를 창건하고, 많은 토지와 노비를 제공하였다. 

1021년에 건립된 현화사비는 채충순이 썼는데 여기에는 현화사의 창건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현종대 현화사에는 토지가 2000경, 노비 100구를 비롯하여 많은 물자들이 있었으며 학도들이 1000명이 넘었다. 

현화사 창건 내력을 적은 비 앞면의 위 부분에는 해와 달을 상징하는 까마귀와 토지 조각이 있으며, 비 양 옆면에는 용이 새겨져있다. 

개성시 방직동 역사박물관 옆에 옮겨진 현화사 7층석탑은 1020년에 만든 것으로 고려초기 석탑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현화사탑에는 탑신받침이 있고, 각층 탑신의 4면에는 감실형태로 판 안상 안에 불상과 보살상이 조각되어 있다.

 

  한편 현화사7층탑이 있는 개성시 방직동 역사박물관 주변에는 

현화사7층탑 외에도 불일사5층탑, 흥국사탑, 탑동 3층탑 등 불탑과 원통사부도가 모여있는데, 

흡사 서울 경복궁 앞의 중앙박물관 뜰 안에 여러 곳의 석탑과 부도가 모여있는 것과 같다. 


불일사는 

951년 광종이 자기 어머니 원찰로 세운 것으로, 개성시 판문군 선적리 보봉산 기슭에 그 터가 있다. 

1959년 발굴하였으며, 그 다음해 불일사5층탑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불일사5층탑은 개성주변에 있는 대표적인 고려초 석탑으로서 국보급 35호로 지정되었다. 

불일사5층탑을 옮길 때 

불일사탑에서는 금동9층탑, 금동5층탑, 금동3층탑, 작은 돌탑 20여개, 작은 청자 사리단지, 불경 등 많은 유물이 나왔는데, 그

것들은 지금 개성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또 이 주위에는 흥국사탑도 있다. 

흥국사는 924년(태조 7)에 개성의 중심부에 세운 절인데, 

법왕사 봉은사 민천사 등 개경 중심부에 위치하였던 다른 절과 마찬가지로 주요 국가차원의 불교행사를 주관하였으며, 정치공간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또한 흥국사는 

고려 신종 초 최충헌의 노비 만적이 난을 일으킬 때 거사장소로 정하기도 하였다. 

흥국사탑에는 글이 새겨져있는데, 이에 따르면 이 탑은 강감찬이 1021년 거란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기념으로 세운 것이라 한다. 

이 탑은 2층부터 탑신이 없어져서 지붕돌만 포개놓은 불완전한 상태이지만 새겨진 글에서 탑을 세운 연대를 알 수 있기 때문에 고려초기 석탑 연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개국사 석등 역시 역사박물관 주변에 있는 주요 불교문화재이다. 

개국사는

 935년 개경의 동남쪽에 창건되었는데, 이곳은 나성의 장패문 바로 바깥으로, 당시 개성에서 동남쪽으로 내려가는 길목이었다. 

따라서 개국사는 고려초 동북쪽에 창건한 현성사와 함께 개경의 관문에 위치하여 개경의 안팎을 연결하고 더 나아가서 개경을 방어하는 중심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개국사 석등은 

높이가 4미터에 가까운 커다란 석등으로 4각기둥 모양을 한 전형적인 고려초기의 석등이다. 

개국사에는 본래 7층탑도 있었는데, 이 개국사석탑은 일제강점기에 서울로 옮겨져 현재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뜰에 남계원 석탑의 이름으로 보존되어 있다. 

남계원은 고려시기 개국사에 속했던 원(院)으로 장패문 안에 있었다. 

개국사가 개경에서 동남쪽으로 내려가는 교통의 요지에 있었기 때문에 개국사에서 남계원을 설치한 것이다.

 

 고유섭에 의하면 

지금 경복궁 뜰에 있는 석탑은 장패문 밖의 개국사터가 아니라 장패문 안의 남계원터에 있었던 것이라 한다. 

이와 함께 개성의 불교문화재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경천사10층탑이다. 

경천사는 1113년(예종8) 나성의 남쪽에 세운 절인데, 이곳 역시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있었다. 


경천사10층탑은 

원간섭기에 원 불교의 영향 속에서 만들어진 탑으로서 얼마 전까지는 경복궁의 뜰에 세워져 있었다. 

이렇게 개성의 역사박물관이나 서울의 중앙박물관 등에 불교문화재가 모이게 된 것도 일제강점기의 유산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위치를 확인할 수 없거나 현지에서 보호하기 어려운 문화재는 박물관으로 옮기는 것이 마땅하지만, 

가능하면 제자리를 찾아주는 것도 이제는 생각해 볼 만한 일이다.

 

  보물급 34호로 지정된 화장사 사리탑도 간단히 소개할 필요가 있다. 

이 부도는 개성시 용흥리 화장사터에 있는데, 고려말에 만든 것으로 우리나라 종모양 부도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 부도 몸돌 앞면에 ‘지공정혜령조지탑’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어서 이것의 주인공이 지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시기 개성에 수많은 절들이 있었지만 이렇듯 남아있는 불교문화재는 몇 기의 석조물이 전부이다. 

그 가운데 개성시 산성리 대흥산성 안에 있는 관음사는 그 자체가 보물급 33호로 지정되었다. 

이는 개성의 절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조선후기의 절 집이 지금까지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 개성에는 복원된 절은 관음사와 안화사 등 극소수에 불과하며 그것도 제대로 복원된 것은 아니다. 

관음사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7층탑 등의 유적이 있는데, 이 중 관음전 대웅전은 남한에서도 문화재로 지정하였다.

 

  지정된 문화재는 아니지만 

흥왕사지와 천수사지(천수원지)를 불교문화재와 함께 소개할 필요가 있다. 


흥왕사지는 개풍군 봉동면 흥왕리에 있는데, 

이곳은 1067년(문종 21) 문종이 덕수현의 치소를 옮기고 대대적인 지원 끝에 창건한 화엄종 계통의 절인 흥왕사가 있던 곳이다. 

이곳에는 1070년 성을 쌓았는데 지금도 성터가 남아있다. 

흥왕사는 고려시기 남쪽의 이궁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천수사지는 장단군 진서면에 있는 고려 예종대에 지은 천수사가 있던 곳이다. 

이곳은 개성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교통의 요지였으며, 조선시기에는 이곳에 천수원이 있었다. 

이 두 곳은 현대아산이 추진하는 공단지역과 인접하고 있는 지역이다.



5). 선죽교와 숭양서원

  고려충절의 상징처럼 되어 있는 선죽교는 개성시 선죽동에 있는 고려시기의 돌다리이다. 

이곳에서 고려말 정몽주가 피살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다리의 옛 이름은 선지교였는데, 

정몽주가 피살된 날 밤 다리 옆에 참대가 났기 때문에 이름을 선죽교로 고쳤다고 한다. 


선죽교에는 본래 난간이 없었는데 

지금 있는 난간은 정몽주의 후손으로 1780년 개성 유수로 있던 정호인이 사람들이 다니지 못하게 하여 다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설치한 것이다. 

선죽교는 국보급 36호로 지정되었으며, 그 옆에는 한석봉이 썼다고 전하는 ‘선죽교(善竹橋)’라고 쓴 비석이 있다. 

또한 이 다리 주변에는 정몽주와 관련된 유적들이 많이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숭양서원과 표충비이다. 


사적 51호로 지정된 숭양서원은 정몽주의 집 자리에 세운 서원이다. 

서원은 조선중기이후 본받을만한 유학자를 제사지내는 동시에 유학공부를 시켰던 일종의 사립학교이다. 

숭양서원에는 정몽주의 위패가 모셔져있다. 


또 근처에는 조선후기 이후에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는 표충비 2개가 비각 안에 들어있는데, 

북쪽 것은 1740년 영조가, 남쪽 것은 1872년 고종이 개성에 와서 그의 충절을 기린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 참고문헌 】

고유섭『송도의 고적』1977 열화당(1945년 초판)
송경록『개성이야기』2000 푸른숲
박용운『고려시대 개경연구』1996 일지사
홍영의「고려 수도 개경의 위상」1998『역사비평』45
박종진「고려시기 개경사 연구동향」『역사와 현실』34 1999
홍영의「고려전기 개경의 오부방리 구획과 영역」『역사와 현실』38 2000
박종진「고려시기 개경 절의 위치와 기능」『역사와 현실』38 2000
신안식「고려전기 충성과 개경의 황성」『역사와 현실』38 2000
박종진「개성의 문화재」『역사비평』54 2001
한국연구사연구회 개경사반『고려의 황도 개경』2002 창작과 비평사
김창현『고려 개경의 구조와 그 이념』2002 신서원
외 다수

 

출처 [우리문화사랑방] 개성의 역사와 남겨진 문화재 
 <한국의재발견> 2005.07.16 18:59